그 여름의 공모전 #05
약속된 시간이 가까워지자 지수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열 시부터 시작한다고 했지. 이제 좀 있으면 시작하겠구나.’
10시가 가까워지자, 참여자 목록에 친구들이 하나 둘 뜨기 시작했다.
반장을 맡게 된 민호가 말을 꺼낸다.
“이제 다 모인 거 같네. 월요일부터 사이트 답사하고 대지조사를 시작해야 되는데, 2인 1조로 하기로 되어 있거든. 조를 짜야 되는데.. 원하는 사람끼리 하는 게 나을까, 아님 그냥 제비뽑기로 할까?”
“난 원하는 사람끼리 했으면 좋겠는데. 마음 안 맞는 사람이랑 조모임하면 너무 힘들어서..”
“그러다 잘 하는 사람끼리만 하면 너무 불공평한 거 아냐? 밸런스를 좀 맞춰야지.”
“이 조라는 건 사이트 조사 때만 잠깐 유지되는 건데, 너무 큰 의미 안 둬도 돼.”
“난 그냥 제비뽑기가 나을 거 같은데..”
여러 친구들의 설왕 설래가 오고 간다. 사실 이런 조 분배는 제비뽑기로 하는 게 가장 군말 없이 갈 수 있는 방법이지만, 아무래도 블랙홀 내지는 폭탄이라고 불리는 소위 프리 라이더(free rider)를 피하고 싶은 게 학생들 마음인지라,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민호나 미나 같은 인기남, 인기녀와 같이 함께 싶은 친구들이 많은 것도 문제다.
“음..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거 같은데. 혹시 벌써 같은 조 하기로 한 애들 있어?”
4명의 친구가 손을 들었다. 학생들끼리 이미 친한 상태에서 설계 수업을 같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 친구들은 이미 마음이 잘 통하는 상태라고 봐야 한다.
“그럼 남은 8명이 문제네.. 나랑, 미나랑, 창민이랑, 수진이랑, 민혁이. 민재. 나영이. 그리고..”
“지수야. 이지수.”
민호는 역시 지수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지수는 속으로 많이 실망했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아, 그래 지수. 미안. 아무튼 이렇게 8명인데. 일단, 나랑 같이 조 하고 싶은 친구 있어?”
3명이 손을 들었다. 여학생 2명과 남학생 1명이다. 약간의 텀을 두고 지수도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민호는 생각에 잠긴다.
‘음.. 내가 선택해야 하는 상황인데.. 누가 나으려나? 수진이는 그냥 저냥 하는 애고.. 그래도 나영이가 낫지 않았나? 남자보단 여자가 아무래도 낫겠지.. 이런 조모임마저 칙칙한 남자랑 하긴 싫으니까. 지수란 애는 솔직히 별로 예쁘지도 않고, 누군지도 잘 모르겠고..’
“난 나영이랑 하고 싶어. 잘 부탁한다 나영아.”
“아, 진짜? 고마워 민호야! 나 진짜 잘할게!”
선택을 받은 나영의 목소리가 밝아진다. 뭐 대단한 연예인과 함께 하는 듯한 기세다. 그걸 듣고 있는 창민의 심사가 뒤틀렸다.
‘저 새끼는 뭐 얼굴 좀 잘생기고 이사장 아들이라는 거 땜에.. 여자애들이 죽고 못사는구나..’
“다음은 미나. 손미나랑 같이 하고 싶은 사람 있어?”
일단 인기남, 인기녀의 조를 선정하고 나면 나머진 쉬워지지 않을까 해서 민호는 미나의 조를 먼저 뽑기로 했다. 역시 인기녀는 인기녀인지라, 남학생 3명의 손이 모두 올라갔다.
“역시 미나 인기가 대단하네.. 미나야, 누구랑 할래?”
연습 도중에 헐레벌떡 조모임에 들어온 미나는 아직도 정신이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제일 빼먹기(?) 좋은 상대인지 탐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창민이란 애는 너무 잘해서 부담스럽고.. 다른 애들이 좀 어수룩하니 상대하기 좋을 거 같아.. 저 민재란 애가 좀 잘하지 않았나..?’
“난 민재랑 할게. 잘 부탁해.”
“아.. 고마워 미나야! 나도 잘 부탁해..”
선택받지 못한 나머지 2명의 학생의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특히 창민은 속으로 크게 실망했다.
‘분명히 내가 이 중에 가장 잘 한다는 걸 알텐데.. 왜 날 선택하지 않는 거지? 저 놈이 나보다 낫다 이건가?’
이제 수진, 민혁, 창민, 지수. 이렇게 4명의 친구가 남았다. 하나의 조가 정해지면 나머지 2명은 자동으로 한 조가 되어야 한다.
“이제 한 조가 정해지면 나머지 2명은 자동으로 한 조가 되어야 하는데.. 그건 너무 강제적이라 좀 별론데. 지금이라도 서로 같이 하고 싶은 친구를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여기까지 남은 4명의 친구는 서로 친분이 거의 없는 사이다 보니 서로를 지목하기가 껄끄러웠다. 특히 교우관계가 거의 없는 지수는 더욱 그러했다.
“그럼 또 한 명씩 지목해서 지원자를 받아야 되나.. 흠..”
약간의 생각을 하던 창민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난 이지수랑 같이 하고 싶은데. 지수야, 넌 어때?”
갑작스런 창민의 제안을 받은 지수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우리 학년에서 가장 잘 한다고 소문난 창민이가 왜 나랑 같은 조를 하자고 하지? 나한테 뭔가 다른 감정이 있는 건 아니겠지? 나란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
“아.. 난 좋아. 고마워 창민아..”
“그래, 나도 고마워. 잘해보자.”
창민은 지수라는 친구가 거의 아무런 말도 없이 주눅 들어 있는 듯한 모습이 불쌍해 보이기도 하고, 지난 학기에 그래도 성실하게 프로젝트를 마무리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어 나머지 2명보단 낫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미나랑 같이 할 수 없을 바엔 아무나랑 해도 상관 없었다. 대지조사 정도야 나 혼자 해치워도 최종 결과물에 큰 차이가 없을 테니까.
“그래. 그럼 됐네. 남은 수진이랑 민혁이가 한 조가 되어야 하는데. 괜찮지?”
“응 그래.. 할 수 없지..”
남은 두 친구는 썩 내키지 않지만 할 수 없이 한 조가 되기로 한다.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까..
“이렇게 2명씩 6개조로, 사이트 분석 과제 하게 될 테니까. 각자 준비 잘 해보자. 사례조사도 같이 해야 되고. 서로 조사한 내용이 너무 겹치지 않도록 세부 주제도 배정되어 있으니까 잘 챙겨서 해줘. 동선 및 교통, 인구구성 및 요구사항, 지리 및 기후, 인문적 배경, 주변 시설, 법규.. 이렇게 되어 있으니까 1조당 1개씩 맡아서 하면 돼. 이제 각 조에서 뭘 할지 정하자.”
각 조의 과제를 정하고 미팅이 끝났다. 창민 – 지수 조는 인구구성 및 요구사항을 맡게 되었다.
“그럼 한 학기동안 잘 해보자. 사이트 조사는 다음 주 월요일 10시니까 다들 늦지 말고. 오늘 모두 고생했어. 잘 자라.”
민호의 마무리 멘트를 끝으로 모든 학생이 대화방을 빠져 나갔다.
지수는 조모임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역시 민호는 나에게 관심이 없구나.. 할 수 없지. 창민이는 너무 잘해서 좀 부담스러운데.. 창민이한테 묻어가는 인상을 주면 안 되니까. 나도 열심히 해봐야지. 인터넷으로 뭐라도 좀 찾아보고 자야겠다..’
창민 역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미나는 역시 인기가 많구나.. 어장 관리 한다는 남자가 엄청 많다는 소문이 진짜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내가 좀 파고들 여지가 있지 않을까? 나 같은 설계 오타쿠에게 그런 예쁜 애가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무린가? 쳇.. 할 수 없지. 일단 지수란 애랑 대지조사부터 좀 해보고.. 사실 학기 설계 정도야 그냥 슬슬 해도 뭐.. 그다지 어려울 건 없겠지.’
이렇게 사이트 조사를 위한 조가 짜여졌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설계의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