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
그런 친구들 있잖아. 재밌는 건 다 하고 같이 있으면 늘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는 친구.
K를 통해 알게 된 영국인 L은 딱 그런 친구였어. 부모님은 짐바브웨 사람이어서 까만 피부를 가지고 있어. 그렇지만 완전 블랙이라기보다는 초콜릿 색의 예쁜 피부야. 아프리카에서는 완전 새까만 색의 피부가 아닌 이 초콜릿 색의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자랑스러워한다더라고.
사실 L은 쌍둥이야. 이란성이지. 그 쌍둥이 여동생이 한국에서 6개월간 교환학생으로 있었기 때문에 L은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음식도 많이 먹고 춘천이나 부산으로 여행도 많이 갔었지만 언제나 한국 얘기는 기승전 클럽으로 끝났어. 나도 안 가본 강남 몽키비치의 죽순이었나 봐.
이런 L이 나와 K를 데리고 1박 2일 런던 투어를 계획했어. 한다면 하는 이 친구는 스케줄표까지 만들어서 우리에게 보내줬어. 볼링을 시작으로 한국 식당 아리랑에서 비빔밥, 제육볶음, 치즈 떡볶이 등을 실컷 먹고, 타워 브리지도 갔다가 빅토리아 스테이션에서 애프터 눈 티세트까지 즐겼어. 그리고 우리는 런던에 있는 L의 쌍둥이 동생 자취방에서 핫한 밤을 보낼 준비를 했지. 한국에서는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어떻게 추는지도 모르는 살사바에 가는 것이 그녀 계획의 하이라이트였어.
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우리가 L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옷은 섹시하게 입을 건데 계속 춤을 춰야 하니까 스니커즈를 신을 거야."
이렇게 대답했어. 그리고 우리는 최선을 다해 화장을 하기 시작했지. 서로의 아이섀도우나 립스틱 색을 칭찬해가면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까지 화장을 하고 지하철을 타러 갔어.
영국은 지하철을 Subway라고 부르지 않고 Underground 또는 Tube라고 부르는데 정말 튜브처럼 생겼어. 오래된 만큼 낙후되기도 했고 역사의 통로나 지하철 자체가 작아서 서울의 지하철처럼 쾌적한 환경은 아니야. 그런 튜브에 몸을 싣고 한껏 멋을 부린 우리는 템플역에 도착했어. 신나서 좁다란 에스컬레이터에서 사진도 실컷 찍어가면서 말이야.
영어도 살사바도 서툰 우리는 무조건 L을 앞세웠어. 살사바에 들어서자마자 L이 겉옷과 가방을 맡기고 손목 띠를 받으면 우리도 바로 따라 했지. 그리고 바(Bar)에서 칵테일을 한 잔씩 주문했어. 클럽 같은 조명에 라틴계 음악이 흐르는 살사바에는 테이블과 스테이지가 나뉘어 있었어. 누가 봐도 불편해 보이게 만든 1층 테이블은 이미 자리가 꽉 차 있었고, 아직 스테이지에서 살사를 출 자신이 없던 우리는 관망을 하며 분위기를 살피고자 2층으로 올라갔어. 오랜만에 마시는 칵테일을 한 입씩 맛보며 스테이지를 바라봤지. 시간이 조금 일러서 그런지 아직 완전히 무르익은 느낌은 아니었어.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살사바의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는데, L이 초대해서 같이 온 친구 S가 남자의 초청(?)을 받아서 스테이지로 내려가 버린 거야. 처음 보는 광경에 우리는 '오오~'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지. 살사의 시옷도 모르는 나는 전문가처럼 춤을 추는 그들을 그저 신기해하며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어.
'지금 나에게 춤을 신청하는 건가?'
S의 행보를 보지 않았다면 어쩔 줄 몰랐을 텐데 앞서 스테이지로 간 친구 덕분인지 어디서 자신감이 나와서 그 남자와 같이 스테이지로 내려갔어. 그 남자에게 말했어.
"나는 살사를 하나도 몰라."
"괜찮아. 내가 리드할게. 너는 그냥 따라오면 돼."
그러면서 스텝을 시작했는데 내가 그 스텝조차도 따라가지 못했어. 살사바 죽돌이 같은 그 남자는 그제야 스텝부터 하나씩 알려주더라고.
긴장한 내 몸은 물 흐르는 듯한 살사 음악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어. 뻣뻣하게나마 스텝을 조금씩 따라가니까 이 남자는 자꾸 어려운 걸 시도하는 거야. 그렇게 버벅대며 한참 춤을 추는데 자꾸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어. 내가 너무 못 춰서인지 그가 자꾸 내 허리를 제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너는 좋은 바디를 가졌으니 그냥 음악에 몸을 맡기면 돼."
야,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우면 내가 지금 이러고 있겠니?
내가 힘들어하는 게 보였는지 L은 눈치를 보며 계속 내가 괜찮은지 확인했어. 처음엔 괜찮다고 했는데 나중엔 도저히 안 되겠어서 그 남자에게 즐거웠다고 말하고 친구들 무리에게로 돌아왔지. 살사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남자가 또 나타나서 춤을 신청하는 거야. 순식간에 심신이 지쳐버린 나는 거절했어. 그런데 남자들이 재밌는 게, 친구들과 막춤을 추며 놀고 있으면 다시 나타나 춤을 청해.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어쨌든 두 번째에는 또 거절하기 미안해서 같이 춤을 췄어. 다시 한번 느꼈지. 나는 정말 살사를 못 추는구나. 그루브라고 해야 하나? 그 뭔가 뽀꼬로꼬 같은 느낌은 타고나야 하는 것 같았어. 그 뒤로 몇 명이 더 춤을 추자고 했지만 나는 다 거절했어. '미안 친구들, 나에겐 뽀꼬로꼬가 없어.'
그중에 기억에 남는 남자 한 명은 홍콩 사람인지 중국사람인지 그 비슷하게 생겼는데 다섯 번을 거절하게 만들더라고. 난 더 이상 누군가와 춤을 추고 싶지 않다고! 여기까지 와서도 충분히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 삐걱거리는 내 몸이 원망스럽기만 했어. 이건 마치 도블레 에레(RR사운드)라고 불리는 스페인어의 그 혀 트릴이 날 때부터 되지 않는 사람의 좌절이랄까.
그 뒤로 우리는 한쪽 벽에서 신나게 놀았어. 옆에 왜인지 현금지급기도 있었는데 그걸 잡고 춤추다가 위에 가득한 잔들도 쓰러뜨리고 말이야. 정신 나간 채로 노는 우리에게 감명받았는지 살사바 사진가가 다가와서 포즈를 잡게 하고 우리 사진을 찍었어. 그가 페이스북에서 사진을 확인하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자 K는 인터넷에 사진이 올라가는 게 조금 걱정이 되었나 봐. 나는 이렇게 말했어.
"뭐 어때? 우리나라도 아닌데."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1년이 훌쩍 넘었을 때, 나는 그 사진을 페이스북에서 찾아냈어. 살사도 못 추면서 치명적인 척하고 있는 우리가 그 사진 안에 있더라고. 정말 남는 건 사진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