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본머스에서 만난 인연
(2018.11.)
영국으로 향하던 때부터 아무것도 정해진 것은 없었어.
마치 안개에 가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바로 한 걸음 앞만 보이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냥 그때 그때 하나님이 나에게 어디로 갈지 말해주시는데 이게 참 기다리기가 힘들어. 사람들은 항상 미래를 미리 알고 계획하고 싶어 하잖아. 그래도 감사한 건 데드라인에 다가서면 다음 길을 보여주시는 거야.
본머스에 있는 어학원에 가게 된 것도 그런 과정 중 하나였어. 나는 본머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어. 아니, 그 이름도 들어본 적 없었어. 유럽 축구팬들은 알겠지만 나는 그 정도로 축구에 관심이 있지 않았거든. 정말 우연치 않게 어떤 사람을 통해서 그곳을 소개받게 된 거지. 그리고 그 어학원을 다니면서 확신했어.
아, 그 분이 나를 여기에 보내신 게 맞구나.
그중의 한 예가 바로 어학원 선생님 R을 만난 일이었어. 그는 배가 아주 남산만하게 나온 전형적인 아저씨 모습의 영국인이었어. 그 어학원에서만 20년이 넘게 일을 하고 있더라고. 그래서 그의 문화수업 시간은 자료가 아주 풍부했고, 영국 역사에 대한 지식도 넘쳐났지. 하지만 나는 그의 정규 영어수업은 그닥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다른 얘기를 너무나 많이 해서야. 나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학생들이 딴 얘기를 좋아하는 건 알아.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지루해지고 언제 수업으로 돌아오나 그런 생각이 든단 말이지. R의 딴 얘기는 끝이 나는 법이 없었어. 게다가 고집이 있어서 어쩔 때는 학생들과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어. 어학원이니까 인종도, 나이도 다양했고 각자 나름의 색깔들이 있었던 거지.
그날도 어김없이 R이 샛길로 빠져서 한참을 이야기하고 있던 날이었어. 나는 더 이상 참기 어려워서 말했어.
"이제 그만 넘어가면 안 될까?"
굉장히 많이 고민하고 한 말이었어.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이런 얘기 잘 못하잖아. 아무튼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시 공부를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어.
"네가 입고 있는 그 후드티 어디서 났어?"
나는 방금 전 내가 한 말 때문에 그가 화가 났나 싶은 마음에 쫄아서 작게 말했지.
"나 하펜든에서 봉사할 때 산 옷이야."
"그게 언제였는데?"
"여기 오기 바로 전에. 4개월 정도."
"나 거기에 살았었어."
"무슨 말이야? 너 YWAM(선교단체)에서 일했어?"
"아니, 어릴 때 거기 살았었어. YWAM으로 바뀌기 전에 거기가 고아원(Children's Home)이었거든."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어.
내가 YWAM 하펜든에 있을 때 예전에 그곳이 고아원이었다는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었거든. 오래전에 세워진 건물들이라 굉장히 낡고 보수할 곳도 넘쳐났어. 그런데 바로 그곳에 R이 살았었다니! 뭔가 소름이 쫙 돋았어.
수업을 마치고 나는 R과 그 이야기를 다시 하게 되었어. 그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지.
"우리 아버지는 인도에서 왔어. 어머니와 그렇게 사이가 좋지 않았지. 두 분이 따로 살게 되고 여러 가지 일들이 있어서 나는 고아원에 들락날락하게 되었어. 그곳은 정말 최악이었어. 거기에 한 선생님이 있었는데 나를 미워했던 것 같아. 말을 듣지 않으면 계단 밑 작은 창고에 날 가두고 식사 때만 밥을 넣어줬어. 거기에는 불빛도 하나 없었지. 어쩔 때는 하루 24시간을 꼬박 갇혀있기도 했어."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담담하게 말하는 듯했지만 어린아이였을 시절 R의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어.
"그곳에서의 나는 정말 불행했고, 그 작은 창고의 기억이 너무 끔찍했어. 그래서 어른이 되고 나서 하펜든 쪽으로는 발길도 돌리지 않았어. 지금 부인을 만나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무렵, 친구한테 전화가 왔어. 갑자기 그 고아원 얘기를 하면서 나보고 꼭 다시 가봐야 한다는 거야. 나는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지. 그 친구는 그곳이 많이 바뀌었다며 부인과 필히 가보라고 당부를 하며 끊었어. 옆에서 듣고 있던 부인이 그러더라고. 그 친구가 당신한테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 같다며 내가 옆에 있으니까 같이 가자고. 이제 괜찮다고. 그렇게 우리는 하펜든으로 가는 일정을 잡았어."
그의 이야기를 차분히 듣는데 무슨 영화를 보는 것 같았어. 내가 불과 몇 주 전에 있던 그곳의 과거가 오버랩되는 것처럼 말이야.
"그 고아원은 YWAM(선교단체)로 바뀌었더라고. 건물들은 그대로인데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어. 내가 살았던 플랫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고,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어. 그랬더니 얼마든지 들어오라며 집안으로 안내해주더라고. 고아원에서의 일들을 이야기하고 그 작은 창고에 갇힌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어. 놀람과 감동의 그런 표정으로 말이야. 그곳을 꼭 내가 다시 봐야 한다며 이끌었어. 그 사람이 그 창고를 여는 순간 눈물이 흘렀어. 나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던 그곳이 기도실로 바뀌었더라고. 그걸 보는 순간 하나님께 너무 감사했어. 내 과거를 치유해주시는 기분이 들었어. 이제 더 이상 그곳은 나에게 상처가 아니야."
지나가다 마주치면 인상이 무서워 피할 것 같이 생긴 배불뚝이 아저씨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나도 같이 눈물이 났어.
"그래서 네가 YWAM 하펜든 티를 입고 있는 걸 본 순간 너무 놀랄 수밖에 없었어."
"나도 너무 신기해. 너의 이야기를 나눠줘서 정말 고마워. God is so failthful."
"Yes, He 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