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질문,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대하여...
조와 싸우고 난 후 화가 난 에이미는 조가 정성껏 쓴 소설의 원고를 불에 태워버린다. 조는 분노한다.
못됐어, 정말 못됐어! 난 그걸 다시 쓸 수 없어. 살아 있는 한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You wicked, wicked girl! I never can write it again, and I’ll never forgive you as long as I live.
자신이 정성을 쏟고 있는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 의해 훼손된다면 얼마나 화가 날까. 어린 시절에는 더욱 그렇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음악 테이프나 CD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용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이나 영화 OST 등을 사서 책상 두 번째 서랍에 차곡차곡 모았다. 친구들이 놀러 오면 자랑스럽게 서랍을 열어 보여주곤 했다. "와 너는 정말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친구들이 감탄하면 뿌듯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나는 앨범을 살 때 취향이 너무 편향되지 않도록 신경 썼다. HOT도 듣고 조규찬도 들었다. 백스트릿보이즈도 듣고 너바나도 들었다. 라디오와 컴필레이션 앨범들을 들으며 최신가요와, 올드 팝송, 인디밴드 음악까지 되도록 다양하게 찾아 들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다. 자주 듣는 음반은 공테이프에 녹음해서 늘어날 때까지 들었다.
중학교 2학년때부터 4살짜리 사촌동생과 같이 살게 되었다. 이모네 집 사정으로 몇 년간 함께 지냈는데, 미운 네 살과 중2병, 그 사이에 초등학생 동생이 둘이나 더 있었으니 집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사춘기의 까칠함이 극에 달해 있었고, 동생들은 성가시기 짝이 없는 존재들로 여겨졌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 돌아온 나는 4살짜리 동생이 내 CD를 뒤적거리며 놀다가 가사집이 딸린 앨범재킷을 꾸깃꾸깃 구겨놓고 일부는 쭉쭉 찢어버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혼비백산 놀라, 소리를 빽 지르며 동생의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렸다. 복구가 불가능하게 망가진 앨범재킷을 보며 나도 울고, 영문을 모른 채 언니에게 엉덩이를 맞은 동생도 울었다.
"너한테 이게 정말 중요한 거구나. 그 나이 땐 그렇게 소중한 게 있지..."
이모는 동생을 달래면서도 나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나무라기보다는 이해해 주려 하신 것 같았다. 나는 불쑥 미안해졌다. 갑자기 내가 붙들고 있는 그 종이조각이 실제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때 나는 별 대답 없이 내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지만, 책상 서랍 두 번째 칸을 가득히 채우고 있는 이 보물들이 더 이상 소중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을까 궁금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mp3를 거쳐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반시장이 변화했고, 이제는 더 다양한 음악을 더 쉽게 찾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나는 점점 음악을 듣지 않게 되었고, 음반을 사지 않은지도 벌써 20년은 된 것 같다. 그때 모았던 테이프들과 CD들은 미니멀라이프에 매료되었던 어느 시기에 모두 폐기 처분되었다. 가끔 그중 몇 개는 남겨둘걸 하는 생각은 든다.
나는 화를 잘 내는 사람이다. 어린 동생에게 그랬듯이, 사소한 일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곤 했다. 한 동안은 불교공부 모임에 몇 년간 참여하면서 어떻게 이 화를 다스릴 수 있을까 골몰했었다. 마음을 잘 써야 한다거나, 상대와 내가 둘이 아니라거나 하는 말들은 아리송하기만 했다. 그러다 책 속에서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나지 않는 것"이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화가 나면 어떻게 그 화를 다스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애초에 화가 안 나면 되는 거구나. 궤변 같으면서도 진리인 것 같기도 한 그 말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아직 그 CD들이 내 방에 쌓여 있을 때, 어린 조카가 온통 그것들을 헤집어 놓고 침을 묻혀 적셔 놓고 찢어놓은 참혹한 현장을 발견한 적이 있다. 나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이미 CD들에 대한 애정은 식은 지 오래였고, CD 보다 어린 조카에 대한 사랑스러움이 더 컸기 때문이다. 나는 울며 불며 속상해하던 열다섯 살의 나를 떠올리며 웃었다.
사실 화의 진짜 이름은 '소중함'이다. 나를 소중히 여기는, 또는 어떤 대상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화가 난다. 그 대상의 소중함이 사라지면 화도 사라진다. "화가 안나는 것"은 결국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말이었나 보다.
나는 여전히 화를 내고 분노한다. 남편이 핀잔을 줄 때는 '소중한 나'를 지키고 싶어서 화를 내고, 아이가 밤에 잠을 자지 않으면 '소중한 내 시간'을 지키고 싶어서 화를 낸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을 보면 '소중한 내 의견'을 지키고 싶어서 분노한다. 어쩌면 소중한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해 화를 낼 수 있다는 건 건강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소중함이 너무 커지면 오히려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든다.
그래서 꾸준히 그 소중함에서 한 걸음씩 물러서는 연습을 한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중2병 소녀에게 이모가 그랬듯이,
그저, 그것이 너에게 소중한 것이구나, 하고 말해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