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의 믿음

나태주, 풀꽃 인생수업 중에서

by 나작

며칠 전 결혼식에 갔다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뒷풀이 자리에 함께했다. 나는 오랜만이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주 만나고 있었다. 같은 분야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기 전 기후변화 공부 모임에 참여하면서,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작게나마 이런저런 일들을 했었다. 다니고 있는 직장에서 찾기 힘든, 사람에 대한 존중과 일에 대한 진지함을 가진 모임이었다. 그때는 퇴근 후 그들과 만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공부하는 것이 진짜 나의 일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내 역할은 모임에서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고 배포용 자료를 만드는 것, 행사나 모금이 있을 때 웹자보를 만드는 것 정도였지만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일이 없나, 꽤나 열심히 얼굴을 내밀었더랬다. 아주 작은 규모였지만 실험적으로 영화를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나름대로 진지하게 다큐멘터리 시나리오를 썼던 기억이 난다. 결과적으로 시도한 것에 의의를 두는 작품이 되었지만.


아이를 낳고, 나는 지방으로 내려왔다. 코로나 펜데믹도 겪었고, 캄보디아에 파견도 다녀왔다. 그 사이에 가끔 서울에 올라가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우리가 하던 활동들에서 나는 조금, 아니 많이 멀어져 있었다. 지역이 멀어서 물리적으로 참여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었다. 나 스스로가 한계를 넘지 못하고 더이상 뭘 하기가 어렵다고 여겼던 것이다.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면 다 빠져나가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콩나물이 자라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그래요. 시루에 콩을 놓고, 채반을 받쳐 놓고, 물을 주는 거예요. 처음에는 물이 그냥 주룩주룩 빠져나가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콩나물이 자라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믿어야 해요.


나태주 시인의 책, 풀꽃 인생수업은 초등학교 교사이기도 한 시인의 따스한 시선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에세이집이다. 가볍게 읽을 책을 고르다가 표지와 삽화가 스웨덴 화가 ‘칼 라르손’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서 읽었다. 나태주 시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개인적으로 몽글몽글 착하고 보드라운 느낌의 글을 선호하지는 않아서 처음엔 뭐, 조금 뻔한 감성인가 싶었다. 끝까지 읽다보니 끈질기게 어루만져주고 토닥여주는 손길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위로가 필요했구나 싶었고, 다 읽고나서는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그들 사이에 앉아 있는데, 전과는 다른 묘한 감정을 느꼈다.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의아해졌다. 나는 그 동안 완전히 엉뚱한 생각을 하며, 엉뚱한 길을 가려고 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의미를 갖는,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찾아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곳에서 멀어져 있었다니.


나는 믿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콩나물 시루 속에서 성장하고 있었다는 걸. 물이 주룩주룩 빠져나가서 나에게 남은 것이 없는 줄 알았다. 보이지 않게 콩나물이 자라났듯 나도 그때 자라고 있었는데.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상처들에 가려져서 그때 내가 숨을 쉴 수 있었던 일들을 잊고 있었다. 정신없이 오가는 대화들 속에서 매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이디어를 반짝이던 그때의 날들이 떠올랐다. 나에겐 그런 시절이 있었다.


아무 소용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이제는 인정해주어야겠다. 그리고 지금도 자라고 있음을 믿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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