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2)
흐린 날의 기억!

푸에르토 바라스

by 파란 해밀


2018. 05. 01.

칠레, 푸에르토 바라스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의 일정을 마치고 거꾸로 돌아 나왔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차를 타고 1시간가량 달려 깔라마 공항에서 산티아고행 비행기를 탔다. 푸에르토 몬트로 가기 위해서다. 그곳에서 푸에르토 바라스와 칠로에섬을 갈 예정이다.


환승을 하기까지 몇 시간의 여유가 있어 산티아고공항 스낵코너에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를 시켰다. 손님이 많아서인지 제법 시간이 걸려서 나온 샌드위치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크기가 웬만한 남자 얼굴만 하다. 입을 있는 대로 한껏 벌려도 한 입에 다 베어지지 않는다. 아보카도와 각종 재료를 듬뿍 넣은 샌드위치는 첫 맛보다 먹을수록 매력있는 맛이나 아무리 먹어도 줄어들지 않는다. 배가 불러 손을 놓았을 때도 2/3 가량이 남아 있다. 칠레의 어마어마한 샌드위치 크기에 한 번 놀라고, 샌드위치 하나와 음로수 한 잔이 3만 5천 원이라는 엄청난 가격에 두 번 놀라고 나서 푸에르토 몬트행 비행기에 올랐다.



산티아고를 출발한 비행기는 밤늦게 푸에르토 몬트에 도착했다. 오늘 하루 긴 나라 칠레를 머리에서 무릎쯤 내려온 것 같다. 밤 10시가 넘어 도착한 푸에르토 몬트 공항은 한적했다. 입국장을 나서자 호텔에 미리 신청해놓은 픽업 서비스 기사가 내 이름이 적힌 종이를 들고 있었다. 보는 순간 마치 엄마라도 만난 것 같다. 낯선 나라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무한 감동이다. 설령 그것이 내가 돈을 주고 산 것이라 해도 울컥하는 반가움으로 여겨진다.


입국장 로비를 나서자 몇걸음 안 걸어 바로 앞에 그의 차가 있다. 메고 있던 무거운 배낭을 받아 트렁크에 실어준다. 배낭만 내려놓아도 날아갈 것 같다. 그의 차에 실려 조용히 공항을 빠져나왔다.



방금 전의 무한감동은 어디가고 사방이 어두컴컴한 밤늦은 시각, 지구 반대편 공항에 혼자 내려 일면식도 없는 남자가 운전하는 차에 실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가면서, 이것이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어디로 끌려가는 건 아닌지...... 또다시 온갖 잡다한 생각들머리 속에서 소용돌이 친다.


차가 공항을 벗어나자 그는 부드러운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 노래는 마치 언 몸을 녹이는 따뜻한 차 한 잔처럼 나의 긴장을 서서히 해제시켰다. 모든 불안을 그 음악에 흘려보내기로 했다.
'어떻게 되기야 하겠어?'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그때부터는 차 창 밖으로 보이는 푸에르토 몬트의 소박한 야경에 취해 뒷좌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 음악에 젖어들었다. 어둠 속에서 멀리 보이는 아련한 불빛들이 낯선 곳에 혼자 떨어진 긴장감을 비집고 자유의 깃발처럼 흔들거린다. 호텔에 무사히 도착 후, 괜한 불안에 미심쩍어했던 기사의 등 뒤에 미안함을 슬쩍 묻히고는 깊은 잠에 떨어졌다.



이튿날 아침,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버스로 30분가량 걸리는 가까운 푸에르토 바라스로 향했다. 작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이다. 마침 간 날이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라 대부분 가게는 문을 닫고 도로마저 한산하다.


날씨는 내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흐린 날이다. 잿빛 구름이 가득했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구름 사이로 간간히 순한 햇빛도 내리비친다. 바람은 불지만 추운 날씨는 아니다. 얼굴에 와 닿는 바람이 부드러워 바다를 끼고 무작정 한참을 걸었다.



해안선을 따라 걷고 또 걸었다. 조용한 바닷가를 따라 조깅하는 사람들이 몇 보였지만 푸에르토 바라스는 길을 통째로 나한테 내준 것처럼 텅 빈 도로에는 파도소리만 배경음악으로 깔려있다.


나는 바람 부는 흐린 날이 참 좋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렸을 적 긴 머리를 감고 나왔을 때 그 날도 이렇게 잔뜩 흐린 날이었고, 때마침 집 근처 예배당에서 은은한 종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때 강렬하게 각인된 느낌 때문인지 바람 부는 흐린 날마다 나는 평생 정신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설렌다.



한 시간쯤 길을 따라 걷다가 반대편으로 돌아가 보았다. 해안가에 철로 만든 커다란 조형물이 눈에 띈다. 여인의 절규가 파도에 섞여 함께 출렁인다. 드넓은 바다로 향하는 그녀의 몸짓에 베인 간절함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한참을 서서 바라보았다. 내 발바닥에 끈끈이를 발라놓은 것처럼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이래저래 복잡한 심정으로 떠나온 여행이라 그녀의 소리 없는 외침에 내가 빙의되는 것 같다.


'내가 다 하지 못한 외침을 그녀에게 부탁해볼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국에 오면 턱없이 용감해지는 것 같다. 속에 맺힌 소리, 차마 다 뱉지 못한 소리, 저 바다를 향해 고래고래 나도 소리칠 수 있을 것 같다.



떼들은 다 어쩌고 다가오는 파도에 용감무쌍하게 맞서기라도 할 듯 물새 한 마리가 당당하게 서 있다. 녀석도 나처럼 바다를 향해 무언가 토해 내고 싶은 것이 있나 보다.



인적이 드문 휴일이지만 간간히 연인들이 보인다. 날씨는 흐려도 연인들의 뒷모습은 언제나 맑음이다. 삼십여 년 전, 남편과 데이트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날도 광안리 바닷가는 오늘 같은 바람이 불었다. 함께라서 바람이 차게 느껴지지 않았다. 살며시 내 손을 잡던 그 날 남편의 따뜻함이 화인처럼 또렷한데 어느새 삼십 년이라는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저들의 등 뒤에 소중한 오늘을 잊지 말라는 속삭임을 수건 놀이하는 술래처럼 슬며시 내려놓는다.



낚시꾼들이 근처에서 고기를 낚고 있다. 혹시나 하는 바람으로 한참을 기다려도 끝내 낚아 올리는 물고기를 보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했다.



뼈대 있는 양반집 개인지, 커다란 누렁이가 저보다 더 큰 돌베개를 베고 자고 있다. 불편하지는 않은 지, 돌베개가 차지는 않은 지, 저러고 자는 누렁이의 뒷모습은 흐린 날씨와 상관없이 평안해 보인다.


찬 것을 베고 자면 입 돌아간다고 친정엄마가 그러셨다. 그래서 어릴 때 더운 여름 시원한 다듬이돌을 베고 있으면 극구 못하게 하셨다. 저 누렁이는 괜찮을까?



공휴일만 아니면 많은 유람선들이 버스처럼 이 곳을 지나다니고 있을 텐데 오늘은 그것도 멈추고 빈 유람선이 종이배처럼 떠 있다. 휴일이라 무료했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한가롭게 다닐 수 있어서 그것도 좋다. 그래서 여행은 다소 복불복인 것 같다. 여행만 그럴까? 때로는 예기치 못하는 일이 일어나는 우리 인생도 복불복이지 않던가?



돌아 나오는 길에 들른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푸에르토 몬트로 돌아왔다. 터미널에서 숙소까지 걷자면 이삼십 분이 걸리는 거리지만 구경도 할 겸 천천히 걸어 나왔다. 돌아온 푸에르토 몬트도 조용하기는 매한가지다. 근로자의 날이라 상점은 대부분 닫혔다지만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갔는지 도시는 적막할 정도다.


바닷가에는 또 검둥이 한 마리가 깊은 상념에 잠겨있다.

keyword
이전 11화(칠레 1) 칠레로 날아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