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3)
땅의 축복, 파타고니아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by 파란 해밀

2018.05.04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



칠레 끄트머리에 있는 푸에르토 나탈레스로 들어왔다.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가기 위해서다. 투어는 출국 전 한국에서 미리 예약을 해서 갔다. 비수기라 혹시 투어가 있을지 몰라 미리 신청했더니 내가 원하는 날짜에 가능하다는 확인서를 보내왔다.


푸에르토 나탈레스는 토레스 델 파이네 국립공원을 가기 위한 전초기지 같은 곳이다. 그래서 딱히 그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작은 마을이다. 마침 내가 간 시기는 성수기를 비껴 난 때라서 이 곳을 찾는 관광객도 별로 없어 동네는 한산하기만 했다. 도착한 첫날은 여유가 있어 마을 곳곳을 걸어서 둘러보았는데 숨죽여 내리는 비처럼 마을도 조용조용했다.



추적추적 비가 내려서 한국에서 가져간 양산 겸 우산을 쓰고 다녔는데 마주치는 현지인들이 나를 빤히 쳐다보며 지나간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라 동양인이라고 해서 특별한 이유는 아닐 텐데 그들의 시선을 의아해했었는데 이튿날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듣고 나서야 조금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워낙 바람이 센 곳이다 보니 비가 올 때 우산이 무용지물이라고 한다. 세찬 바람에 우산은 쉽게 구겨지고 못쓰게 되어 현지인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거의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동네에서 다니는 사람들 중에 나처럼 우산을 쓴 사람을 못 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동양에서 온 여자가 아무것도 아닌 가는 보슬비에 작고 예쁜 우산을 쓰고 다니니 그들의 눈에는 색달라 보였을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이른 조식을 먹고 투어에 나섰다. 숙소 앞까지 픽업을 온 승합차에는 브라질에서 온 가족 4명이 먼저 타고 있었다. 큰 딸과 작은 딸 커플 그리고 어머니는 이번이 파타고니아가 두 번 째라고 한다. 처음 왔을 때 너무 좋아서 이번에 다시 오게 되었는데 남편은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자기들끼리 왔다며 투어 내내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한국에서 이곳을 오자고 40시간을 날아온데 반해 한 번 온 곳을 다시 보고 싶다며 이웃나라에서 징검다리처럼 톡 건너와도 되는 그들이 속으로 엄청 부러웠다.



투어는 승합차로 공원을 돈다. 경치 좋은 곳곳에 내려 주변을 걸을 수 있는 시간을 준다. 성수기에는 수많은 트래커들이 찾는 성지 같은 곳이라고 한다. 그때는 수많은 사람들과 자동차로 발 디딜 틈이 없는데 오히려 조용하게 둘러보기에는 지금이 좋다고 가이드가 귀띔을 해준다. 이 끝이 보이지 않는 공원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는 그의 설명에도 나는 선뜻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아무려면 이 곳이 그 말처럼 다 차기야 하겠어? 이렇게나 넓은데?'

속으로 그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지만 점점 눈 앞에 펼쳐지는 대자연의 아름다움 앞에 이내 그럴 것 같다는 고갯짓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이라 해도 숙소를 나설 때 사방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싸여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한참 차를 달리는데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고 그제야 주변이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국립공원을 가는 길에서부터 눈으로 가늠되지 않는 드넓은 광활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다.


칠레는 아무렇게 생겨먹은 이 축복 같은 땅덩어리로 가만히 있어도 숱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데 반해,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왔던 자원이 부족하다는 우리나라는 얼마나 동동거리며 살고 있는지........ 갑자기 신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3시간이면 부산에서 서울을 가는 작고 작은 나라가 세계열강들 사이에서 이만큼 살고 있는 것이 새삼 자랑스럽고 나는 또 어설픈 애국자가 된다.



칠레 파타고니아는 사계절이 모두 공존하는 곳이었다. 봄인 듯싶으면 겨울의 얼음을 품고 있고, 여름인 듯 초록이 있으면 이내 가을 단풍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다. 말이 국립공원이지 이곳은 광활한 대지, 화산과 빙하가 공존하고 온갖 동물들이 제멋대로 살고 있는 미친 대자연이었다. 생 날 것 같은 이곳이 백패커들에게 어찌 걷고 싶은 파라다이스가 아니겠는가? 파타고니아는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외에도 왠지 모를 엄숙함마저 든다. 그것은 아마도 자연이 가지고 있는 본성 때문이 아닐까?



가는 곳곳마다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는 저 들짐승들을 보며 몇 번이고 가이드에게 정말 주인이 없냐고 물어본 나는 찌들 대로 찌든 영락없이 속된 촌년이었다.



가이드가 얘기한 대로 이곳에는 바람이 엄청 불었다. 특히 지대가 높은 곳에서는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 정도로 세차게 바람이 불었다. 한국에서 1년 동안 맞을 바람을 이곳 파타고니아에서 다 맞은 것 같다.


혹시라도 추울까 봐 옷을 겹겹이 껴입고 간 이유도 있지만, 세찬 바람이 그렇게 추운 바람은 아니어서 투어 하는 동안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이보다 더 늦은 시기에는 나처럼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들은 시기를 잘 조정해야 할 것 같다.



새벽부터 해 질 무렵까지 차를 타고 돌아도 다 보지 못하는 이 광활한 자연을 가진 칠레가 부럽고, 우리에겐 없는 것이 화가 나기도 한다. 사람이나 국가나 참 공평하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오뉴월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진 칠레 밑동을 댕강 분질러서는 돌아갈 때 가방 안에 돌돌 말아 갖고 가서 부산 밑 어디쯤에 떡하니 붙여놓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루 온종일 걸린 투어였지만 지치는 줄 모르고 정신 팔려서 다녔다. 그러고도 다 보지 못한 곳이 있어 아쉬움도 남는 곳이다. 며칠에 걸친 힘든 트래킹을 마친 사람들의 벅참 감동이 불어오는 바람에 남아 있는 것 같아 어림짐작으로 느껴보기도 한다. 보지 못한 곳이 있다고 브라질 모녀처럼 언젠가 또다시 쉽게 올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이 한 번의 기억으로도 파타고니아는 내게 강렬한 인상을 새겨 놓았다.



자연 앞에 건방 떨지 말아야지......

말이 없다고 업수이 여기지 말아야지......

자연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충분히 경건한 존재였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다시 어두컴컴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종일 파타고니아에 내 정신줄을 풀어헤쳐놓고 다녔다. 물 먹은 솜뭉치 같은 피로에도 결코 피곤하지 않은 하루였다. 파타고니아는 그렇게 마약 같은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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