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5)
칠레의 이유!

이스트섬

by 파란 해밀


2018. 05.11. 칠레 이스트섬



이번 칠레 여행의 이유는 오로지 이스트섬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이스트섬은 꼭 가 보고 싶은 곳이었다. 직장에 매인 50 중반의 아낙이 남미를 해마다 나가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작년, 페루를 오가면서 긴 비행시간 동안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던 왼쪽 날개뼈의 통증은 '다시는 남미에 오나 봐라' 하는 항복을 하게 했지만, 한 번 가 본 남미는 '그래도 꼭 다시 간다' 는 오기를 품게 했다.


이스트섬은 남미에 대한 또 하나의 간절한 이유였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 다소 긴장은 되었지만 이스트섬에 대한 간절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페루의 마추픽추가 그랬듯이 이스트섬이 왜 칠레의 이유인지 그 절박한 이유를 나도 잘 모른다. 어떤 사람이 그냥 좋은 것처럼, 그냥 이곳에 꽂힌 걸로 해두어야겠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성수기인 4월까지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출발하는 국내선임에도 백만 원을 훌쩍 넘는 웬만한 국제선 가격인데 반해, 한 달을 살짝 비껴 나니 그 가격의 절반 값으로 티켓을 예매할 수 있었다.


숙소도 다른 지역에 비해 턱없이 비싸다. 당초 함께 가기로 한 일행이 있었지만 취소되는 바람에 좀 더 저렴한 숙소를 알아보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곳도 없고, 항가로아 근처에 있는 것은 대부분 고가의 숙소들 뿐이다. 이스트섬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과업수행(?) 같은 것이라, 숙소가 비싸거나 말았거나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파타고니아 일정을 마치고 푼타 아레나스에서 산티아고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1박을 하면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샀다. 이스트섬에도 마트가 있긴 한데 물가가 비싸서 미리 사가면 좋다고 해서 샀는데, 솔로 여행자로 먹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들은 현지에 가서 필요한 만큼 소량 구매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드디어 이스트행 비행기를 탔다. 빈자리 하나 없이 큰 비행기가 빼곡히 다 들어찼다. 새삼 설레는 비행이다. 4시간가량 지났을까? 갑자기 승객들이 일어나 "와!~~~~" 하는 함성을 지른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스트섬이 발아래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여행객들도 나만큼이나 이곳을 원했던 모양이다. 마치 모두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좋아라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뺨에 와 닿는 바람부터 달랐다. 아주 달콤하고 부드럽다. 그토록 원하던 이스트섬에 발을 디딘 것이 꿈만 같았다. 숙소 호스트가 나와서 미리 준비해 온 꽃다발을 목에 걸어 주었다. 느낌이 새롭다. 섬에는 대중교통이 없어 여행객이 공항에 도착하면 미리 예약해 둔 숙소에서 픽업을 하러 나온다. 작은 입국장 앞은 막 도착한 사람들과 마중 나온 사람들로 잠시 북새통이다.




내가 묵을 숙소 호스트는 산티아고에서 들어온 사람인데 이따금 비행기 조종사로 투잡(?)을 뛴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영어는 매우 유창했고, 내가 머무는 기간 중에도 한동안 보이지 않길래 물어보았더니 타히티에 비행을 하고 왔다고 한다. 비행기 대리(?) 운전과 숙소 운영 중 어느 것이 본업인지 혼자 심각하게 저울질을 해보았다.


섬을 둘러보기 위해 렌터카는 필수다. 자전거나 도보로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숙소에서 렌터카를 신청했다. SUV 차량을 빌리는데 하루 35만 원으로 입이 떡 벌어지지는 가격이지만 별다른 수가 없다. 이럴 때는 혼행이 아쉽지만 차가 있는 오늘동안 섬을 다 둘러보아야 한다. 다음 날 차를 타고 섬을 돌기 시작했다. 길이 단순해서 운전하기 어렵지 않을 거라 했지만 도로에 아무런 표지판이 없어 간혹 갈림길에서 헷갈려서 당황스러웠다.



달리다 보니 차츰 긴장도 가라앉고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스트섬은 생 것 그대로였다. 시퍼런 물 그대로, 짙푸른 초록 그대로...... 어딜 가도 꾸미거나 덧입히지 않은 벌거벗은 그대로였다. 이스트섬은 이정표에 인색했다. 그 이유는 한동안 차를 달려보고서야 알았다. 이 곳에는 이정표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곳이었다.


바람이,

나무가,

파도가,

하늘이

이정표였다.



니 것, 내 것, 줄을 긋는 생활에 익숙한 나의 시선에 저들은 얼마나 생뚱맞아 보였는지......

눈에 잘 띄는 뒷다리 어디쯤에 빨간 매직으로 이름이라도 써놔야 하는 것 아닌가?

당장 목줄을 해서 어디다 묶어놔야 되는 것 아닌가?

찌들 대로 찌든 도시 촌년의 속된 생각이 주책맞게 자꾸 튀어나온다. 이런 나의 불안이 가소로운지 녀석들은 오히려 더 유유자적하게 풀을 뜯는다.



오롱고의 푸르름!
손가락으로 찍으면 짭조름한 파란 물이 금세 손톱에 물들 것 같다.

누가 저토록 맑은 파랑을 만들 수 있을까?

자연은 본디 저토록 투명한 파랑인데......

눈이 시릴때까지 한동안 쪽빛 바다를 바라보았다.



입구에서 투닥투닥하던 노부부의 푸닥거림도 오롱고의 푸른 바다에 어느새 풀어지고 나란히 걷는 도타운 뒷모습이 참 보기 좋다. 부부는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라더니......

저 부부의 동행이 오래오래 하기를 기원하며 나도 함께 눈으로 노부부를 따라간다.



뭍이 되고 싶었던 걸까?
바다는 땅을 밀고 들어와 작은 물웅덩이가 되어 그 품을 사람들에게 내어주고 있다. 화려한 파라솔이나 썬베드가 필요 없다. 아름드리나무 그늘이 쏘아대는 햇빛을 가려주고, 아무 천이나 풀밭에 깔면 그게 바로 선베드다. 그 위에 사람이 대자로 드러누우면 지나가던 동네 개가 다가와 처음 보는 낯선 이에게 기대어 졸고 있다.


어느새 항가로아에 석양이 길게 드리우고 있다.



뜀박질하는 소녀의 발 뒤꿈치에도 고단한 이스트섬의 석양이 걸려있다.



지구 반대편에서 헐레벌떡 내가 출근하는 아침 시각, 이스트섬에서는 뜨겁게 달구어진 태양이 모하이 등 뒤에서 더운 숨을 고르고 있다. 나도 앉아 가만히 숨을 죽이고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수평선 저 너머 어디쯤 내가 살고 있겠지...... 나를 깨우던 아침 해는 여기 와서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섬사람들의 등을 토닥여주고, 해거름녘 내가 지친 일과를 정리할 때 태양은 이곳으로 와 닫혀있는 섬집의 아침 창을 또 흔들겠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을 벗어나 날아온 이스트섬은 표백하지 않은 광목 같은 곳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이들의 쳇바퀴는 돌아가고 있다. 저 반대편 작은 나라에는 나의 생활이, 이 곳에는 이들의 삶이. 그저 시간과 장소가 다를 뿐 항가로아에도 일상의 해가 뜨고, 또 일상의 해가 지고 있다.


일상은 벗어나고 싶다고 벗어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벗어 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일상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 치기보다 이제는 나와 함께 잘 굴러갈 쳇바퀴로 받아들이고 싶다.



keyword
이전 14화(칠레 4) 소박한 칠로에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