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는 여행에 대한 전환점이자 내가 살아가는 데 커다란 용기를 준 계기가 되었다. 이때만 해도 혼행의 경험이 거의 없던 내게 먼 남미를 혼자 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인터넷 여행 카페에서 동행을 만나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급작스러운 사정으로 인해 혼자 가게 되었다. 혼자 갈 것인지, 여행을 포기할 것인지를 두고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지 모른다. 어쩌지 못하는 일인 줄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함께 가지 못하는 동행이 야속하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이미 벌려놓은 판이 너무 큰 상황이라 되돌리기에는 많은 데미지가 있고, 계획을 모두 접자니 칠레를 갈 거라고 이미 들뜰 대로 들뜬 마음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오롯이 설레기만 한 것도 아니다.
혼자 그 먼 곳을 가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만만치 않았다. 떠나기 전까지, 아니 산티아고 공항에 내려 깔라마로 환승하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나는 이번 여행이 어떻게 될지 무척 불안했다.
국내선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샌드위치를 먹고도 시간이 남아 공항 로비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공항에서 산 유심을 넣고도 인터넷이 잘 되지 않아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옆에 앉은 젊은 흑인 여성은 열심히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다.
어떤 사이트를 쓰는지 물어보면서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행차 왔느냐? 어디로 갈 거냐? 는 내 질문에 그녀는 아프리카 출신으로 이곳에 다니러 왔는데 산티아고에 살고 있는 친척 오빠가 데리러 올 것이라고 한다. 그녀 말대로 얼마 되지 않아 친척 오빠라는 사람이 왔다.
그 오빠는 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동생의 커다란 짐 보퉁이를 챙겨 공항을 빠져나갔다. '나도 누군가가 나를 데리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나를 칠레 대왕 오징어 배에 팔아넘기려는 인신매매업자(?)가 와서 가자고 해도 아마 얼씨구나 하고 따라나섰을 것이다. 두 사람이 인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며 오빠가 마중 나온 그녀를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모른다.
그때만큼 동행이나, 의지할 사람을 간절하게 바란 적이 또 있을까 싶다. 그렇게 나의 칠레 여행은 부러움과 두려움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두려움은 차츰 잦아들었고, 혼자라서 불안했던 생각은 혼자라서 자유롭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동행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하고 있을까?" '동행이 있다면, 내가 지금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상황들이 많았다. 낯선 여행객과 만나 갑작스러운 동행이 되기도 하고, 그들과 웃고 떠들어도 동행때문에 불편해하지 않아도 된다. 일정이 맞으면 같이 다녀도 되고, 같이 밥을 먹어도 된다.
갑자기 계획이 틀어지거나 바뀌어도, 돈을 더 쓰거나 말거나, 밥을 먹거나 말거나, 새벽같이 일어나도 그만, 안 자도 그만이다. 그때부터 혼자 하는 여행의 더없는 편안함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함께 오기로 했던 동행에게 고맙다는 생각마저 들어간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결코 혼자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오기로 한 덕에 칠레를 서슴없이 선택했고, 일찌감치 일사천리로 진행할 수 있었다. 동행이 예정되지 않았다면 혼자 올 계획은 절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에 대한 야속함은 어느새 진정한 감사로 바뀌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내가 멀리 뛸 수 있도록 구름판 역할을 해준 사람이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그녀로 인해 나는 배수진을 치고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맞았고, 견디고 헤쳐 나와야 했다. 칠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덕분에 여행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하고 싶을 정도로 그녀가 고마웠다.
이번 칠레 여행을 통해 새옹지마를 톡톡히 경험한 셈이다. 어찌하지 못하는 진퇴양난의 두려움이 불행이었다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딘 작은 용기와 도전이 극한의 두려움을 최고의 성취감으로 바꿔주었고, 혼행을 즐길 수 있는 여유로움을 덤으로 얹어 주었다.
살다 보면 여전히 두려울 때가 있고 힘들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칠레 여행을 떠올린다. 피할 수 있는지, 피하고도 나는 행복할 수 있는지, 그러고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지...... 자분자분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러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답을 찾아간다.
그것이 반드시 정답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덜 후회하는 답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반 백 년을 훨씬 넘도록 살면서 내가 가장 잘한 것은 선택의 갈등에서 늘 덜 후회하는 쪽을 선택하려고 했다. 할 것이냐? 말 것이냐? 갈 것이냐? 말 것이냐?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숱한 선택 앞에서 후회하지 않는 쪽으로 화살표를 던졌다.
왜냐하면 이미 이전에 많은 후회를 했었고, 그로 인한 부질없는 상심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는 것은 크나큰 어리석음이라는 것이 오래전부터 나의 모토가 되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이 목표라고 한다면, 이번 칠레 여행은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채근하고 격려해준 훌륭한 코치 같은 존재가 되었다.
끝이라고 생각한 상황에서 다시 한번 나갈 용기를 챙겨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에서 그래도 한 발자국 내디뎌 볼 마음을 먹어본다.
포기는 나중에 해도 늦지 않고, 불행이 불행하기만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이번에 알았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은 어쩌면 한꺼번에 같이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가 그것을 다 보지 못하거나 한 쪽만 보고 속단하는 것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