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4) 소박한 칠로에섬

by 파란 해밀


2018. 05. 02. 칠레 칠로에섬



칠로에섬을 가기 위해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7시경에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올라갔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포함해서 겨우 2~3명 정도 그 시각에 아침을 먹고 있다. 조용하고 느긋하게 아침을 즐길 수 있어 좋다. 이곳은 해가 늦게 떠서 아직도 사방이 어두컴컴하다.

그래서 이른 새벽밥을 먹는 건지, 늦은 저녁을 먹는 건지 푸에르토 몬토에서 머무는 3일 동안 아침을 먹을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다. 커피가 식어가고 음식을 담아온 접시 바닥이 거의 보일 때쯤이면 앞에 있는 통창 너머로 주변은 희뿌연 허물을 벗을 준비를 한다.



버스 터미널에서 칠로에섬으로 가는 티켓을 끊었다. 새로운 곳을 향하는 표를 받아들 때마다 언제나 가슴이 설렌다. 푸에르토 몬토에서 출발해서 칠로에섬까지는 2시간가량 걸린다. 버스로 가다가 바닷가에 도착하자 승객을 실은 채로 버스는 기다리고 있던 페리로 들어가 제 발로 실린다. 내려서 옮겨 타고 할 필요가 없어 편리하다. 그때까지도 게을러터진 칠레의 태양은 완전한 햇빛을 비추지 않는다.



다시 또 제 발로 걸어 나온 버스는 칠로에섬을 향해 달린다. 처음부터 끝까지 칠로에는 소박한 섬이다. 이름난 유명한 휴양지도 아니고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관광지도 아니다. 잘 났다고 고개 빳빳이 쳐든 높은 빌딩도 없고, 고만고만한 집들이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모여있다.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곳이다. 어딜 가나 사람들이 오가는 버스 터미널은 복잡하다. 정신없는 터미널을 빠져나오니 어디로 가야 할지 갑자기 막막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딜 갈 거라고 딱히 계획하고 온 것이 아니라서 좌우를 몇 번 쳐다보다가 그냥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눈에 띄는 가게로 갔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칠레 특유의 간단한 간식 같은 빵을 파는 곳이다. 식당을 모르면 사람들이 많은 곳을 가라고 했는데 맛이 괜찮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내 입에는 그다지 맞지 않다.

때마침 어디서 냄새를 맡고 왔는지 커다란 검둥개가 내 손밑에서 굵은 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앉아서 빵을 바라보고 있다. 잘 됐다 싶어 녀석에게 그 빵을 주니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큰 입으로 단숨에 해치운다. 녀석은 오늘 봉 잡은 날이다. 같이 시킨 커피 한 잔을 점심으로 퉁치고 사부작사부작 칠로에섬을 걸어보기로 했다.



전망 좋은 해안가에는 어딜 가나 고급 레스토랑(?)이 있기 마련이다. 복잡한 시장통을 빠져나와 바닷가로 나오니 주로 식당이 이어져 있다. 그렇다고 화려하거나 고급진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딜 가나 비슷비슷하다. 칠로에섬의 특징적인 것을 하나 꼽으라면 물 위에 기둥을 세워 지은 목조건물이다.

아시아권에 있는 수상 가옥에 비하면 그 규모를 비할 바가 아니지만 그래도 다른 곳에 비해 흔한 건물은 아닌지 칠로에섬 하면 제일 먼저 검색되는 것이 이런 수상가옥이다.



길을 따라가다가 막히면 되돌아 나오고, 가는 길이 심심하면 옆 길로 새어본다. 신기하게도 이 소박한 섬 중심지는 네모 반듯반듯하게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빤히 내어다 보이는 길이 지루해서 외곽으로 벗어나 걸어보았다. 가는 길에 있는 낡은 상점 쇼윈도에는 하나 같이 푸근하게 생긴 인형들이 놓여있다. 한 가족 같아 보이는 인형들에게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이고 아래로 난 길로 따라가 보았다.



내려간 곳은 뜻하지 않게 오가는 사람도 드물어서 한적하고 조용하다. 동네 어디를 가도 깨끗하다. 건물들은 다 오랜 시간을 버티어 온 것 같은데 어떻게 관리를 하는지 도로에는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하다. 바닷가에 놓인 작은 벤치에 앉아서 피곤한 다리를 조금 쉬었다.



다시 바닷가를 따라 난 길을 걷기 시작했다. 밭일을 하고 오는지 곡괭이를 어깨에 맨 노부부 한 쌍이 건너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무슨 재미난 일이 있는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거의 눈빛이 마주칠 정도로 가까워지자 먼저 "Holla?"하고 인사를 건넨다. 나도 "Holla"하고 답을 했다.

나의 발음이 그럴싸(?)해서 내가 스페인어를 잘할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을까? 할아버지는 연신 웃으며 나에게 뭐라고 말을 빠르게 쏟아내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다.



언어는 달라도 그의 따뜻한 마음은 전해오는 것 같다. "ciao"라고 내가 아는 마지막 남은 스페인어를 털어 인사를 건네자 노부부는 또 한 번 커다란 함박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며 지나간다. 사용하는 말은 달라도 이처럼 서로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데,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가까이 있으면서도 늘 낯선 이방인으로 남아있는 우리들의 서툰 관계가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웬만큼 마을을 돌아보고 버스 터미널쪽으로 향하는데 오르막길 한 옆으로 예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제법 긴 계단인데 그림을 보면서 오르다 보니 힘든 줄 모르고 걷게 된다. 그럴 요량으로 벽화를 그려두었을까? 그림이 없었다면 내쳐 올라가느라 힘들어서 투덜대었을 텐데, 알록달록 눈을 끄는 그림은 쉬엄쉬엄 가라고 내 시선을 잡는다. 물리적인 거리나 높이는 변한 것이 없는데 내 생각이 어디를 향하고, 어떻게 보는냐에 따라 그 거리나 높이가 문제 될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 생각이라는 것이 어려운 상황을 버티게 하는 진통제 같은 것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올라와서 되돌아본 마을은 동화 속에 나오는 순한 아기 같다. 화려하지도 않고, 활기 넘치는 액티비티가 있는 곳도 아니다. 대단한 눈요기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유명세로 관광객들이 들끓는 식당도 없다. 그래서 그런 곳에 익숙한 여행자들은 밋밋하고 심심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실제로 밋밋한 곳이긴 하다. 심심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자꾸 뒤돌아 봐 지는 것은 그저 섬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 그 자체로 꾸밈없는 그들의 생활이 고스란히 얼비치는 투명한 셀로판지 같은 곳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오르막은 오르막대로, 내리막은 내리막대로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올라와서 내려와서 보는 각도에 따라 마을은 다른 얼굴,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생각 없이 발이 가는 대로 아무렇게 다녀도 되는 곳이다. 한 나절을 그렇게 싸돌아 다니다가 터미널 가는 길에 있는 노점에서 과일 2천 원어치를 사서 푸에르토 몬토행 버스에 올랐다. 푸에르토 몬토에 도착했을 때 이미 도시는 짙은 어둠이 깔리고 깊은 잠에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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