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페루를 다녀온 이후 나는 남미 앓이를 시작했다. 페루의 첫 목적지인 아레키파 공항에 도착하기 전, 상공에서부터 느낀 남미 특유의 색상에 나는 얼마나 살 떨려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작은 시작에 불과했고 그 울림은 끝내 거부할 수 없는 황홀한 유혹이었다. 마추픽추가 페루의 이유였다면 이스트섬은 칠레의 이유였다. 기어코 가야겠다는 마음은 긴 비행 시간도 나를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나 3주 일정으로 칠레까지 가는 동행을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여행카페에 동행을 구하는 글을 올렸더니 생각지도 않게 함께 가겠다는 분이 있었다. 자유여행 경험이 없으니 모든 것을 나한테 맡기겠다는 그녀의 말에 몇 달에 걸친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숙소와 모든 일정을 시작으로 거의 마지막 마무리 점검을 앞두고 있었던 어느 날, 함께 하기로 한 동행으로부터 출국 2주를 앞두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가지 못하겠다는 카톡을 받았다. 몹시 당황스러웠다.
페루를 한 번 다녀오긴 했지만 남미라는 원거리가 다소 부담스러웠고, 혹시라도 발생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서 한 명보다는 옆지기가 있으면 서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동행을 구했었는데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더군다나 비행기 티켓까지 다 끊어놓은 터라 철석같이 같이 갈 줄 알고 환불되지 않는 조건으로 두 사람이 사용하는 넓고 쾌적한 숙소를 잡다 보니 고스란히 그 비용을 혼자 감내내야 하는 상황을 맞아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갑작스러운 상황은 어찌 됐든 받아들여야 하는 요지부동의 현실이었다. 분주해진 마음으로 부랴부랴 바꿀 수 있는 숙소는 바꾸고 다시 일정을 보완해서 솔로여행을 위해 최종 점검을 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그냥 포기할까?' '내가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했다. 가까운 일본도 아니고 그 먼 남미까지 혼자 가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계속 나를 흔들어댔지만 되돌리기에는 너무 멀리 왔고, 되돌리기에는 가지 않아서 남는 미련이 너무도 클 것 같았다.
드디어 4월 26일. 멀고 먼 칠레를 향해 혼자 날아갔다.
작년에 동기와 함께 경유했던 달라스 공항을 이번에는 혼자 머물면서 많은 생각이 스쳤다. 아마도 혼자 하는 여행이라 누군가와 함께 했던 빈자리가 더 크게 여겨진 것 같다. 다시 또 올 일이 있을까? 했던 그 공항, 똑같은 그 자리에 혼자 앉아 환승할 비행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친구 대신 옆에 앉은 한국에 와 봤다는 칠레 부부와 칠레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칠레에 관해 물을 수 있는 것은 다 물어보았다. 아마도 혼자 가는 남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들었던 자잘한 걱정도 잊고 그때부터는 기대감이 조금씩 앞서기 시작했다.
칠레.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칠레 북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산티아고에서 깔라마까지 비행기를 갈아타고 와서 다시 차로 1시간가량을 달렸다. 가는 동안 때마침 기사가 틀어 준 남미 노래를 듣는 순간 그동안 꽁꽁 여며둔 그리움 같은 것이 왈칵 쏟아져내렸다. 나도 미처 몰랐던 페루의 잔상이 가슴 속에 진하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작년에 이어 올해 다시 남미를 찾은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노래를 들으며 양 옆으로 끝없이 펼쳐진 건조하고 황량한 벌판을 보는 순간, 무언가 콧잔등을 묵직하게 누르는 것이 있었다. 긴 여정의 피로도 잊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울컥함과 설렘에 나는 내내 떨고 있었다.
그렇게 내달려서 산 페드로 데 아타카마 숙소에 도착했다. 비행기를 네 번 갈아타고 한국에서 출발한 지 40시간이 지나 거의 탈진하기 직전, 첫 숙소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아무도 없이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해야 한다는 긴장을 한 보퉁이 끌어안고 드디어 첫 목적지에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해서 체크인을 하고 배낭을 정리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그제야 오슬오슬 한기가 느껴졌다. 한국에서부터 괴롭히던 감기가 잔뜩 약이 더 올라 있었다. '도착 첫날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 점심도 거르고 숙소에서 쉬기로 하고 반나절을 누워있었다. 이러다 칠레 여행을 죽 쑤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방에 있는 이불을 있는 대로 다 뒤집어쓰고, 난방을 세게 틀어놓고 정신없이 곯아떨어졌다. 몇 시간을 그렇게 자고 나니 몸이 조금 회복되는 것 같았다. 오슬거리던 한기도 한층 나아졌다. 무사함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지 다시 한번 실감하며 늦은 점심도 먹고 달의 계곡 투어 예약도 할 겸해서 시내로 나갔다.
시내라고 할 것도 없이 여행사들이 있는 곳은 숙소에서 걸어 10여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가는 동안 흙담으로 지어진 집도 구경하고, 남미에 다시 발을 디딘 벅참 감동을 누르며 한 발, 두 발 아끼듯 걸었다. 숙소 호스트가 알려준 다운타운이라는 곳은 여행사와 그나마 몇 안 되는 가게들이 있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소박한 곳이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곳이 이 지역에서 가장 버라이티(?)한 곳이긴 했다.
다니다가 아무 여행사에 들어갔다. 다음 날 출발하는 투어를 예약했다. 하루 온종일 하는 투어 비용으로 만 6천 원 정도였다. 예약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른 여행사 앞에 붙여놓은 볼리비아 우유니 사막 투어 광고물이 눈에 띄었다. 꼭 가보고 싶은 곳으로 꼽아둔 곳이다. 언젠가 볼리비아 여행을 꿈꾸며 시내 구경을 하고 타박타박 느린 걸음으로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해도 뜨기 전에 숙소 앞으로 픽업을 왔다. 꽤 괜찮은 대형 버스인데 이제 막 승객을 픽업하기 시작했는지 나를 비롯해 2~3명 정도가 타고 있었다. 몇 집 있어 보이지 않는 작은 동네 골목 곳곳을 돌아 결국 대형 버스는 관광객으로 가득 찼다.
가는 동안 가이드는 버스 안에서부터 관광지에 대한 안내를 시작했다. 승객들은 세계 각지에서 왔지만 대부분 스페인어가 가능하고, 영어 통역이 필요한 사람은 나 혼자 뿐이었다. 스페인어로는 길게 설명하는 듯한데, 영어로는 왠지 간단히 해치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수의 비애가 슬쩍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랬거나 말았거나 달의 계곡에 도착하고 나니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도착한 곳은 달에 가면 정말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름처럼 생긴 "달의 계곡"이었다. 처음 보는 진풍경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달에 가면 이렇겠지' 하던 생각이 '달에 가면 이럴 거야'로 바뀌기 시작했다.
보는 순간, 단 번에 그런 생각이 들만큼 그곳은 이름 그대로 정말 달의 계곡처럼 생겼다. 처음으로 달에 도착한 닐 암스트롱처럼 나도 칠레의 짝퉁 달에서 신기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40시간을 날아온 고단함,
가끔씩 치받던 혼자라는 두려움,
오슬오슬 떨려오던 한기까지 한꺼번에 날려버리게 했다.
어디에 이런 대책 없는 지랄병 같은 용기가 있어서 여기까지 왔는지.......
무엇이 이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내 안에,
내가 삼킨 저 뜨거운 태양 같은 삶의 독약이 아직 녹지 않아서는 아닌지......
뒤죽박죽 섞인 만감에 몸서리치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듯, 무심한 아타까마의 태양은 지고 맞은편에서 달은 슬며시 졸린 눈을 비비며 떠오르고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다 삼킨 듯한 아타카마의 석양에 내 마음 한구탱이 슬쩍 걸쳐 넣어놓고 뻘갛게 빨갛게 디디며 돌아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