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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 해밀 Aug 10. 2020

(일상)
138,800원에 내 영혼을 팔았다


2020. 05. 31(일)

138,800원에 나는 영혼을 팔았다.


그것은 혼돈의 20대인 나를 들뜨게 하고, 정신없이 내달리던 30대에 가끔 따뜻한 커피 한 잔 같은 존재였다. 여전히 흔들리던 40대에 작은 어깨를 내어주고, 삶의 의미가 통째로 사라진 50대에 아이 같은 장래희망을 조용히 손에 쥐어준 내 영혼을 내다 팔았다.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  모든 휴가를 해외여행에 쏟아부었는데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연차도 돈도 굳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 즈음에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가졌는데 이제는 그조차 모두 포기했다. 잘 갖고 놀던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처럼 한동안 헛헛하더니 정신 차리고 보니 잊고 있었던 집안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온다.


낡은 싱크대, 꾀죄죄한 벽과 천정, 전혀 맘에 들지 않는 올드한 욕실 컬러......  그동안 여행과 집안 살림 중에서 나는 언제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행을 선택했다. 그랬던 것이 여행을 못 가게 되니 밀쳐두었던 살림살이들이 하나 같이 맘에 들지 않아 바꾸기로 했다.



싱크대, 욕실, 가전제품, 가구를 바꾸고 거실 페인트칠을 했다.  문제는 늘어난 살림에 가려진 공간이었다. 그중에 하나가 방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는 책이다. 두 어번 정리를 했는데도 여전히 넘쳐나는 책은 처치 곤란이다. 큰 아들 녀석은 간간히 책과 내가 그린 그림들을 버리라고 했지만 꿋꿋이 버티고 있었다. 그것들은 나와 함께 지내온 나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점 늘어나는 책에 반해, 점점 좁아드는 집을 보며 나도 그 한계에 부딪치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근처에 사는 조카가 알려주었다.

"이모, 그냥 내다 버리지 말고 중고 알라딘 서점에 갖다 파세요."
"그래도 될까?"


구매 가능한 책을 알라딘 앱으로 먼저 체크하고  바코드가 있는 책 가운데 낙서가 없고 깨끗한 상급 이상인 것들만 100여 권 정도 추렸다. 그렇게 골라냈는데도 여전히 책꽂이에 꽂힌 책의 양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남은 책들은 바코드조차 없는 아주 오래된 책이거나, 색이 바랜 책, 책을 살 때마다 첫 페이지에 느낌을 휘갈겨쓴 것들, 앱에서 구매 거부로 뜨는 책들...... 기타 등등이다. 그렇게 불합격 판정을 받은 책들이  책장에 그득하다.

외출을 하고 돌아온 아들을 꼬드겨 일요일 저녁에 책을 싣고 팔러 나갔다.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서점 안은 상당히 넓었다. 얼마 만에 와보는 서점인가? 늘 더 저렴하고 편리한 인터넷으로 책을 구매하다 보니 서점에 들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직원 두 명이 일일이 책장을 넘기며 상태를 점검하고는 바코드를 찍었다.  그럴 때마다 매입 가격이 나타났다. 작게는 400원부터 1,100원, 1,700원..... 3,500원 최고 가격이 6,000원이다. 새 책이나 다름없는데 참 어이없는 가격이다. 그중에는 재고가 많이 있어 일부 탈락된 책도 몇 권 나왔다. 통과된 책 86권 모두 합쳐 138,800원이다. 직원이 물었다.

"138,800원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내가 안 괜찮다고 하면 어찌해줄 건가? 다른 방도도 없으면서 직원은 의미 없는 질문을 한다.

" 제 영혼을 판 값이네요?"
내 머릿속에 깃들고, 심장에 쌓여 지금의 나 자신이 되게끔 지켜준 버팀목들이다. 카운터 직원은 내가 한 말의 의미와 무게를 이해했을까?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고 서점을 나왔다.  무거운 책을 옮겨준 아들에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 같아 옆에 있는 맥도널드를 찾았다.

"엄마 영혼을 판 것 같은 이 느낌을 너는 알 수 있겠어?"
"아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그래도 엄마와 함께 30년 이상을 함께 하며 지금의 엄마가 되게끔 해 준 소중한 친구 같은 존재인데, 너도 그런 친구가 갑자기 먼 길을 떠난다면 어떨 것 같아?"
"이제 안 읽는 책들이잖아요"

잠시 내 말에 공감을 하는 듯 가볍게 머리를 몇 번 끄덕였지만 마지막에는 칼 같은 말로 점을 찍는다. 녀석에게 그 책들은 그저 넘쳐나는 쓰레기이거나 냄비받침대 정도였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남은 책 열두어 묶음을 재활용 쓰레기로 내어놓았다.  한 시간쯤 지나 내다보니 그조차 폐지 줍는 할머니가 수레로 실어가고 없다. 아직도 처리해야 할 책들이 내어 놓은 만큼 또 남아있다. 군데군데 이빨 빠진 책꽂이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래된 문갑, 낡은 재봉틀, 유행이 한참 지난 식기류.......
그동안 나는 시어머니의 묵은 살림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는 며느리의 입장이었다. 깔끔한 새 아파트에 격 떨어지는 군내 나는 세간살이를 눈에 거슬려하는 며느리의 생각에 골백번 동조하며 실리와 실용의 편을 들었다. 볼품없는 살림살이 하나하나에 깃든 시어머니의 인생은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내 아들이 그런 것처럼......, 내가 그랬던 것처럼......

젊어서는 물건이 단지 물건 그 자체이던 것이 나이가 들수록 물건보다 그 속에 깃든 추억과 사연에 더 무게가 느껴진다.



궁핍한 살림에 어렵게 하나, 둘 장만했을 세간살이,  오랜 세월 손때 묻은 야트막한 문갑은 힘들 때마다 남몰래 혼자 내뱉었던 한숨과 푸념을 조용히 들어주었을 것이다. 철마다 아이들 옷을 만들어 입혔던 든든한 재봉틀은 야트막한 오르막에도 거친 숨을 내어 쉬는 노인네처럼 페달을 밟을 때마다 그렁그렁 가래 섞인 소리를 내는데도 어머니들은 내다 버리지 못한다. 아마도 길고 고단한 삶을 함께 살아온 그들의 그림자이자 어머니들의 인생 그 자체라서 그렇지 않을까?

반지르르하고 새 것만 좋은 줄만 알았던 내가 138,800원에 내 영혼을 팔고서야 알았다.
어느새 나도 어머니의 그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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