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확진자가 조금씩 늘어나고, 그로 인한 추가 확진자들이 성난 들불처럼 번져갈 때도 이러다 조만간 잡히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음 여행을 기다렸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반년이 되어간다. 하반기에는 다시 예전처럼 여행을 갈 수 있으리라 했던 확신에 찬 기대는 이젠 다 타 버린 지 오래다.
퇴근 후에 꼬박꼬박 집으로 바로 오고 주말에도 별 수 없이 방콕(?)을 하면서 그동안 안중에도 없던 집을 손대기 시작했다. 주방가구를 바꾸고 나니, 욕실이 거슬려 바꾸었다. 거실 벽과 천정 색을 바꾸고 가구를 갈아치웠다. 방 한가득 꽂혀 있는 책을 팔고, 그래도 수북이 남은 책은 급기야 처리업체를 불러 한 트럭 실어 보냈다. 책갈피갈피에 깃든 수많은 내 기억까지 그대로 실어 떠나보냈다.
그래도 그림만은 차마 어쩌지 못하고 있었는데, 방과 창고 한가득 쌓여있는 오래된 나의 그림들은 언제나 큰 아들로부터 지청구를 듣는 존재였다.
"어머니, 그림들도 좀 버리시지요?"
'망할 놈! 지가 그림을 그려나 봤나?' '그림 한 점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갈등과 씨름을 해야 하는지 지가 알기는 아나?'
아이들이 대여섯 살 때부터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10년 넘게 그린 것 같다. 그림은 나에게 유일한 돌파구였다. 직장과 육아, 살림에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내게 일주일 단 하루, 물감 냄새를 맡을 수 있었던 그 2시간 동안은 오로지 나 자신으로 머물 수 있는 농축된 시간이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있기는 할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게 쌓인 그림 한 점, 두 점은 나를 지탱해준 버팀목이었다. 완성된 그림 그 자체보다도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내가 누렸던 행복과 희열, 숱한 갈등 뒤에 선물처럼 받은 성취감, 그리고 그림이 주는 침묵의 위로는 가족이나 친구보다 더 굳건하게 나를 지켜준 든든한 나무 같은 존재였음을 아들은 절대 모를 것이다.
그렇게 분신 같은 그림들을 이번에 처분하기로 했다. 늙어가면서 이제 나도 하나, 둘 버리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훗날 그 안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그저 나무 판때기, 그림 연습장 정도로 여기며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게 하는 것보다는 내 손으로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마음먹었다.
나이를 먹는 만큼 비우고, 덜어내야 마음이 가벼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을 보니 나도 이제 늙긴 늙은 모양이다. 물질이든, 감정이든 움켜쥐고 있는 만큼 힘들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나이 들면서 몸이 늙어가듯, 감정의 기력도 점점 사위워가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쉽게 그림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옆에서 아들이 자꾸 채근을 하니 은근 야속하고 심통이 나면서도 이젠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조바심이 들기도 했다.
쓰레기로 처분하기에는 내 살점 같은 그림들이라 벼룩시장에 내어놓았다. 혹시나 소중히 해 줄 주인을 만나면 뽀개지고 버려지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해서였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재빠르게 구입 의사를 전해왔다.
그들 중에는 그림을 그려본 사람, 혹은 그림을 이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캔버스 한 장 값도 안되는 터무니 없는 가격에 그림을 구하게 되어 고맙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조차 일반 공산품처럼 가격을 흥정하는 사람들 앞에서 내 심장은 숭덩숭덩 시뻘건 선지처럼 베어 지는 것 같았다.
'그래, 내 살붙이 아들 녀석도 모르는데 남들이 어찌 알꼬?'
그래도 웬만큼 그림을 아껴줄 분들이 2~3점, 많게는 6점을 가져갔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떠나보낸 그림 한 점, 한 점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것 같다. 족보 같은 그림 서너 점만 간직하고 대부분의 그림은 새 주인을 만나서 갔다.
"이사한 지인들한테 집들이 선물로 그림을 주니까 참 좋아하더라고요"
하면서 5점을 가져간 분은 굳이 하지 않은 사인을 해달라고 한다. 더 좋은 그림을 그리면 해야지 하면서 사인을 하지 않은 그림이 대부분이다. 사인에 대한 무게감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나는 쉽게 사인을 하지 못했다. 내가 만족하지 않은 그림에 마침표를 찍는다는 것이 주저주저해서 일부러 비워두었던 것이다.
집 정리를 하면서 붓도 깡그리 다 없애서 사인할 붓이 없다고 해도 그분은 전혀 물러날 기색 없이 집요하게(?) 사인을 요구했다. 마침 물감이 몇 개 남아 있고, 작은 오일도 하나가 있어서 하는 수 없이 임시방편인 면봉으로 붓을 대신했다.
오일을 흥건히 붓고 물감을 섞어 졸업식 송사 같은 사인을 했다. 몇 년 만에 해보는 사인이라 처음에는 어색하더니 자꾸 하다 보니 마지막을 장식하는 휘날레 같은 요염한 기교가 속절없이 고개를 쳐든다. 그렇게 뒤늦은 사인을 모두 해서 한 무더기, 두 무더기 그림을 꾸려서 떠나보냈다.
뒤돌아 생각해 보면 그림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고스란히 나 자신으로 머물 수 있었다. 늘 동동거리며 직장과 가정에 온 힘을 쏟아부으면서도 살모사 대가리처럼 꼿꼿이 고개를 쳐드는 나 자신에 대한 갈망과 갈증을 원 없이 해소할 수 있었던 곳이 이젤 앞이었다. 1주일에 6일을 하녀처럼 일을 해도 단 하루, 2시간 동안 이젤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당당한 여왕이었다.
오일 냄새에 취해 때로는 나 자신도 잊어버리고 그저 그림 그리는 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물감 냄새에 많은 것을 삭히며 버티기도 하고, 몇 번이고 두텁게 덧칠하는 붓질에 차마 다 뱉지 못하는 속앓이를 그 안에 풀기도, 묻기도 했다. 그렇게 그림은 나의 속 이야기를 다 들어주는 속 깊은 친구 그 이상이었다.
미친 듯이 바쁜 30대를 보내고, 때 아닌 질풍노도 같은 40대에 어이없이 휘청이기도 하고, 60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여전히 나는 꾸역꾸역 삶의 숙제를 하고 있다.
혼돈의 20대에 서른이 되면 편안할 줄 알았는데, 눈, 코가 제대로 붙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바빴던 30대에 나는 불혹의 마흔을 파라다이스처럼 학수고대했다. 기대했던 40대도 별 수 없이 지나며 슬금슬금 쉰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50이라는 나이는 어릴 적에 내 발가락을 쏘고 달아난 벌처럼 내 마음을 팅팅 불어 터지게 했다.
그러고 보니 모든 나이마다 치루어야 하는 인생의 과제가 있는 것 같다. 지금이 흘러가면 평안할 것 같아도 또 그다음 나이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흔들어댄다.
인생이 통째로 허무하게 느껴졌던 50대에 나는 생각의 무게를 토하고 또 토해냈던 것 같다. 그렇게 비움을 통해 깃털 같은 가벼움 뒤에 인생의 진중함을 알 수 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일까? 마음이든, 물질이든 그동안 거머쥐고 있던 것을 비우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이번 일을 통해 또다시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버티고 있던 책상을 비워낸 자리에 장판이 움푹 패었다. 내 안에도 그렇게 패인 자리 두 어개가 생겼다.
책을 비워낸 책장에 고양이가 낼름 들어와 앉는다. 청소하느라 이리저리 다니는 나를 지치지도 않고 따라다니더니 텅 빈자리에 앉았으니 녀석이 더 또렷이 보인다.
' 그래, 비우니 더 잘 보이는구나......'
거실에 어지럽게 그림을 널어놓고 사람들에게 선을 보일 때는 모르겠더니 한 무더기 빠져나가고 텅 빈자리를 돌아보니, 그동안 간직했던 수십 년의 시간을 단번에 떠내려 보낸 것 같아 남은 그림을 마주보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뭇잎 하나하나에 깃든 갈등, 제대로 살리지 못한 핏빛 같은 붉은색, 세차게 부딪히는 햇살 한 줄기를 그리기 위한 몸부림까지 성난 혓바늘처럼 살아 고스란히 느껴지는데, 모든 게 떠나간 빈자리에 나는 그저 빈 허깨비처럼 남아있다.
한 바탕 전쟁처럼 치르고 난 뒤 거실에 퍼질고 앉아 나무 똥가리에 북북 사포질을 했다. 아직도 여전히 거친 내 생각을, 떠나간 그림을, 휑한 책꽂이 같은 마음을 떨구려 꾹꾹 힘을 주어 밀고 또 밀었다. 나무를 갈고 색을 입혀 작은 화분과 받침대를 만들었다.
페루 우로스섬에서 사 온 인형 두 개가 청포도색 다육이 옆에서 산초씨 같은 눈으로 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