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2. 16. 베트남 다낭에서 둘째 날은
호이안에서 다낭으로 넘어와 반나절 정도 대충 둘러보고 아무런 느낌이 없는 건조한 도시에 잠시라도 더 머물러 있기가 싫었다. 일정이 조금만 더 있었더라도 후에를 다녀올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내일 출국해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눌러 있기로 했다.
함께 했던 후배가 하루 일찍 출국이라 보내 놓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익숙한 제자리로 돌아온 것 같다. 가 볼만 한 곳을 찾다가 다낭에도 미술관과 박물관이 있는 것을 알았다. 선택의 여지없이 "Danang Fine Art Museum"으로 향했다.
입장료로 2만 동 정도 낸 것 같다. 입장객이 아무도 없어서 혼자 미술관을 전세 낸 것처럼 둘러보았다. 3층으로 되어 있는데 회화, 조각, 도자기 등을 층별로 구분해서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작품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그림이다. 색감이나 사람의 묘사가 재미있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회화는 그다지 많지 않다. 최근에 그린 작품이 많고 눈이 번쩍할 만큼 시선을 끄는 작품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래도 다낭에서 느낀 갈증을 이 곳에서 조금은 해소한 곳이다.
여행을 할 때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이 있으면 가급적 들른다. 그림은 내가 좋아서 가는 것이고 박물관은 그 나라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빼곡하지 않으면서도 유연한 선으로 고양이를 그린 작품이다. 털의 움직임을 잘 살리면서도 과하지 않은 표현에 반해서 코 앞에까지 들여다보며 선을 쫓아가 보기도 했다. 반짝이는 눈망울과 오똑한 코가 우리 집 고양이를 많이 닮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여행을 갈 때마다 늘 녀석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북적거리는 이름 난 미술관에 비해 사람이 없으니 밀려다니지 않아도 되고, 앞사람의 등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관람할 필요도 없다. 쫓아오는 옆 사람을 의식해 후딱 걸음을 옮길 필요도 없어서 마치 혼행처럼 머물고 싶은 자리에 오래 머물고 내 맘대로 볼 수 있어 텅 빈 미술관이 한산한 여행지 같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엄청난 인파에 떠밀려 다녔던 것에 비하면 그런 명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나간 붓 끝 하나, 하나에 눈을 맞추고 붓 터치를 느끼며 모처럼 호젓한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허리가 아프면 앉아서 멍 때리며 바라보기도 하고, 어찌 만들었는지 코를 박고 쳐다보기도 한다. 전시관을 거의 다 둘러볼 때까지 관람객이 한 사람도 오지 않는다. 작품에 따라 어두운 조명을 한 곳에서는 약간 긴장도 된다.
'입구에 경비가 지키고 있으니까 '
하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나이가 들수록 평소 혼자 하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여행, 영화, 전시회, 식사, 운동 등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혼자서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당당함이 노후의 큰 벗이자, 재산이 될 것이다.
같이 할 사람이 없어서 시작을 망설일 필요가 없고, 누구에게 기대거나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정서적인 독립이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취향이 맞지 않은 사람들과도 맞추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던 젊은 날에 비해 이제는 오롯이 내 취향을 즐길 수 있어서 늙어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편하고 좋다.
젊어서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필요에 의해서도 많은 사회의 관계망 속에서 지내야 했지만 나이 들수록 어느 정도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젊은 시절에 비해 경제력이나 활동력이 떨어지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변화도 그렇고, 생각의 변화에 따른 삶의 패턴도 조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5년 전쯤, 내가 다니는 유화 수업을 같이 듣겠다는 남자 선배는 등산, 암벽 타기, 마라톤 등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적지 않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겠다고 나서는 그는 내가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내가 이다음에 더 늙어서 다리에 힘이 빠져서 산을 갈 수 없고, 달릴 수 없을 때는 앉아서 할 게 필요한데 그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그때 처음 알았다. 늙어가는데도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미술관을 나와 근처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길만 알면 걸어서 10분 정도면 갈 길인데 구글 네비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골목골목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몇 번을 물어물어 가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박물관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중국 여행객들의 왁자지껄한 웅성거림이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부터 먼저 들린다. 미술관에 비해 관람객들은 좀 있었으나 그다지 혼잡하지는 않다. 다낭을 찾는 많은 단체 관광객들에 비해 박물관을 찾는 수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아 조용히 둘러볼 수 있다.
박물관에는 조각과 도자기 등을 비롯하여 베트남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조형물과 사진들이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전쟁 전시관이다. 이 곳에는 베트남 전쟁에 관한 각종 전시물이 있다. 전쟁 속에 자행된 군인들의 잔인한 행동을 탓하기 이전에 어떠한 이유로도 이 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간절했던 곳이다.
군인의 모자에 쓰인 "War is Hell"처럼 총을 들고 전쟁터에 뒹구는 그들에게조차 전쟁은 지옥인 것이다. 무엇을 위해 저들이 황금 같은 청춘을 지옥 같은 전쟁에서 불살라야 했는지 안타까운 일이다.
베트남 시민을 구타하는 한국군의 사진 앞에서는 미안해서 더 이상 서 있을 용기가 없어 잠시 목례를 하고 피하듯 그 자리를 떴다. 그렇게 혼자서 용을 쓰며 돌아보고 다시 입구 쪽으로 나오니 어느새 중국 관광객들은 모두 떠나고 박물관은 조용히 다음 관람객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박물관에서 차를 타고 참 박물관을 찾았다. Cham Temple에서 발굴된 각종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1인당 6만 동이다. 잔돈도 바꿀 겸 20만 동을 건네었더니 나이가 있어 보이는 여자 매표원이 1만 동짜리 4장만 내어주고 잠시 손을 멈춘다. 마치 줄 돈 다 준 것처럼.
더 이상 10만 동을 내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내가 20만 동을 내었다고 말하니 그제야 1만 동을 더 주면 자기가 5만 동을 주겠다며 굳이 불필요한 행동을 하며 지갑에서 10만 동짜리를 꺼내 준다. 이미 준 4만 동에서 10만 동만 더 주면 간단히 끝날 일을 1만 동이 더 가고 5만 동을 주는 단계를 더 거치며 자신의 속내를 숨기려 한 것일까? 이미 그 속내가 다 보이는데 말이다. 별다른 의도가 없을 거라고 억지로 생각하며 내가 지폐도 구분할 줄 모를 만큼 맹하게 생겼나? 하며 옆에 있는 유리창에 잠시 내 얼굴을 비쳐본다.
앙코르와트를 본 사람들은 적잖이 실망할 것이다. 앙코르와트에 비해 그 정교함은 턱없이 떨어진다. 그것이 실력의 차이인지, 재료 탓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앙코르와트의 그 섬세함과 결코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 것을 만든 재료가 사암인 것을 알고 나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사암이다 보니 매우 디테일한 것까지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거야 라며 내 맘대로 위안을 삼는다.
전시관에는 조명이 있는 전시품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조명이 열 일을 해주는 것 같다. 사람들만 조명빨에 사활을 거는 줄 알았는데 전시관에 진열된 작품들도 매한가지이다. 조명이 제대로 있는 것과 없는 작품의 차이가 확연하다.
사람이나 작품이나, 값을 매긴 물건이나 조명의 끗발이 얼마나 그 가치를 좌우하는지 헛헛한 웃음을 지으며 전시관을 나왔다. 어쩌면 나도 조명에 가리어 본질을 다 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