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로아티아)
​갈등은 나를 키운다

by 파란 해밀


2020. 12. 30.



그동안 다닌 여행 중 최악을 꼽으라면 단연코 크로아티아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여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소중한 애증의 경험이기도 하다. 크로아티아 여행이 없었다면 아마 그 이후 나의 혼행도 없었을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내 마음 같을 줄 알았던 순진한 때가 있었다. 여행이라는 목적 아래 누구든지 좋은 동행이 될 거라는 철딱서니 없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모험이고 도박인 줄 떠나 보고서야 알았다.




2016년, 한 번도 만난 적 없이 오로지 온라인에서 뭉친 여자 넷이서 크로아티아로 떠났다. 아래 위로 두세 살 정도 나이차는 있지만 다들 세월에 곰삭은 50대였다. 막내와 둘이만 가기로 했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두 사람이 더해졌다.

자유여행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세 사람과 한 번도 낯선 사람과 여행한 적 없는 나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신바람 나게 여행을 계획해서 출발했다. 그들은 패키지여행을 탈피하여 느긋한 자유여행을 즐기고 싶어 했고, 나는 혼행을 위한 사전 단계로 나서는 조심스러운 시작이었다.

그러나 신바람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성격이나 취향의 차이는 차치하고라도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컸다. 특히 금전 문제가 제일 큰 화근이었다. 30년 지기와 여행한 것이 전부인 나로서는 모든 것을 믿고 한꺼번에 정리하려 했었는데, 그들은 상황이 다르니 달리 생각해야 했는데 낯선 사람과 여행한 적이 없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불찰이었다.

당초 막내가 총무를 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출국 당일 해외 체크카드를 분실하는 바람에 급히 여행경비를 내 계좌로 이체하는 소동을 겪으며 혼비백산한 그녀는 정신이 없었고, 동갑내기는 귀찮은 일을 떠맡기는 것 같아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싶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연장자라 빼고 나니 맡아서 할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잘 맡기지 않는 내 성격도 한몫 거든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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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이 얼떨결에 총무를 맡아 네 사람이 쓴 모든 비용을 공동 경비로 관리하자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침저녁으로 침침한 호텔방 조명 아래 엎드려 빼곡히 써 내려가자니 이게 뭐 하는 일인가 싶었다. 더욱이 세 사람이 웃고 떠드는 동안에도 나 혼자 계산기 두들기며 잔돈푼까지 맞춰 적으려니 귀찮기도 하고, 슬그머니 짜증도 났다.


"혹시 회계 같은 것 많이 해봤어요?" 여행 4일째 접어들 즈음 동갑내기가 내게 물었다.

"네. 이런저런 모임에서 많이 했어요"


그때까지도 나는 그녀가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젊었을 적, 그동안 많은 모임에서 회계를 맡았지만 그들은 이미 잘 아는 사람들이었고 회계 관리에 정해진 루틴이 있었지만, 이들과는 초면이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채 익히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나중에 한꺼번에 정산을 하려고 했던 내 생각에 그들은 의문을 넘어 상당한 의심을 하고 있었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어 그 후로는 매일 최소한의 공동 경비만 갹출해서 쓰고 나머지는 각자 관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바꾸고 나니 일이 많이 줄어서 훨씬 수월했다. 이런 게 경험에서 오는구나 싶었다. 다양한 체험을 해보지 않았으니 그저 내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만 했던 데서 오는 한계이자 오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4일 동안 쓴 경비를 정산하는 데서 문제가 터졌다. 나머지 두 사람에 비해 동갑내기의 반응은 거의 조사 기관의 심문에 가까웠다. 어이가 없고 화가 났지만 감정대로 대응하면 언성이 높아지고 결국 여행 쫑내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당장에라도 그만두고 그들과 떨어지고 싶었지만 감정을 누르고 최대한 조곤조곤 설명을 했다. 그럼에도 미심쩍어하는 그녀의 반응은 쉽게 털 수 없는 불쾌감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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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공간에서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하는 남은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나에 대한 오해는 그들 입장에서 그럴 수 있겠다고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나 행동은 내게 상당한 모멸감을 주었다.


'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나?'

' 내가 이 짓 하려고 이들과 여기 왔나?'


하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지만 무지에서 비롯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내 불찰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소리에 한차례 고성이 오갔지만 어쨌든 전쟁 같은 정산을 무사히(?) 치렀다. 빼곡히 기록한 수첩을 마치 증거자료(?)로 삼으려는지 연신 폰으로 찍어대는 동갑내기를 허탈하게 바라보다가 꾹꾹 감정을 누르며 말했다.

"경험이 없어 나의 미숙함으로 생긴 오해는 이해하지만 과도한 불신은 상당히 불쾌합니다. 그러나 그 불쾌감은 이번 여행을 통해 앞으로 혼자 여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니 그 고마움으로 상쇄할게요"



한국에 도착해서 며칠이 지나 연장자로부터 톡이 왔다. 초반에 공동 경비 출금 차 인출할 때 수수료가 더 인출되었으니 그것도 정산하고, 카드 분실한 일행의 여행경비를 내 계좌에 넣었다가 출금했으니 나한테서 빠져나간 수수료도 함께 정산을 하자는 것이었다.

내 계좌에서 빠져나간 수수료는 안 받아도 되니 내가 지불할 금액만 계산해서 알려주면 송금하겠다고 했다. 수수료를 받자고 그들과 연결하는 것도 싫고 다시 맞닥뜨리는 정산이라는 상황도 싫었다. 며칠을 기다렸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한테서 빠져나간 금액이 있으니 나를 제외하고 세 사람이 정산을 한 모양이었다. 그것으로 화려한(?) 크로아티아 여행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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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은 혼자 오지 않는다'
'갈등은 나를 키운다'

이 일을 겪으며 든 생각이다. 힘들었던 것은 분명하다. 당장에라도 내팽개치고 오고 싶을 만큼 극도로 화가 치밀었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나도 얻은 것이 분명히 있다. 그들과 함께 갔지만 각자 움직이기로 하면서 현지에서 혼자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혼자 떠나지 못했을 것이고, 혼자 다닐 기회조차 가질 수 없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고마운 동행이기도 하다.

적(?)과의 동침이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들이 있어 가능했고, 여행에 있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단계의 알을 깨고 나올 수 있었다. 나의 혼행은 그렇게 극심한 진통을 겪고 나서야 가능했다. 이 일로 여행에 대해 미처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었고,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으니 소중한 경험인 것도 사실이다.


갈등은 저 혼자 탈래탈래 빈손으로 오지 않는다. 잘 이겨냈을 때 쥐어줄 선물과 함께 오지만 그 때까지 견디지 못할 때가 많다. 살면서 사람이나, 상황이나 부둥켜안고 갈등하는 일이 좀 많을까마는 들여다보면 그 안에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반드시 있다. 얼마나 잘 찾아내어 내 것으로 할지는 각자의 몫이며, 잘 찾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몫인 것 같다.

어디선가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그녀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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