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브로브니크에서 마지막을......
두브로브티크 마지막 날, 크로아티아를 떠나기 하루를 남겨 놓은 날이다. 자그레브를 시작으로 슬로베니아를 거쳐 위에서 아래로 크로아티아를 훑으며 이 곳까지 왔다.
마지막 날은 특별한 계획 없이 무작정 올드타운으로 나가보기로 했다. 올드타운 여기저기를 다시 꼼꼼히 돌아볼 심산이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올드타운 쪽으로 가고 있는데 섬 투어 상품을 안내하는 직원이 보여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급작스럽게 섬 투어를 하기로 결정했다.
점심 식사를 배에서 제공해주고 섬 세 곳을 둘러보는 상품이다. 오전 10시에 출발해서 오후 5시경에 돌아오는 하루 투어이다.
일찌감치 사람들은 다 승선을 하고 배가 떠난 터라 난데없이 어디선가 나타난 운전기사가 나를 차에 태우고 다음 선착장까지 데려다주었다. 거의 007 작전이었다. 있는 대로 속도를 내어 겨우 선착장에 도착해서 기다리던 있는 배를 탔다.
많은 여행객들이 이미 배에 있었고, 빈자리에 가서 앉아 숨을 돌리고 둘러보니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골고루 있다. 마침 옆 자리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온 남자 대학생이 친구들과 여행 왔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갔다.
세 개의 크고 작은 섬을 둘러보는데 그중에 로푸드 섬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섬은 조용하고 깨끗했다. 혼자 섬 이 곳 저곳을 둘러보는데 백발의 할머니가 선텐을 즐기고 있다. 상반신을 거의 다 드러내고 볕이 잘 드는 둑에 앉은 그녀와 눈인사를 나누었다.
마침 좀 쉬었다 갈 겸 그녀 곁에 앉았다. 햇볕이 이렇게 좋은데 왜 긴 옷을 입고 있느냐? 자기처럼 옷을 벗고 햇빛을 즐기라고 한다.
습도가 높지 않아 햇빛은 따가웠지만 더운 줄 모르고 긴 옷을 입고 다녔는데 그런 내가 딱해 보였나 보다. 그 날의 햇살은 눈이 부시다는 말로도 부족한 그런 햇살이었다.
바지 위로 삐져나온 뱃살이나, 온몸에 깨를 뿌려놓은 듯한 잡티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멋지게 햇빛을 즐길 뿐이었다. 멋진 선베드가 아니어도, 튼튼한 돌침대(?)에 타월 한 장 얹으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한 세팅이다.
60을 넘긴 나이에도 그녀는 젊은 사람들 못지않게 활기차다. 이 섬에 살고 있다는 그녀는 너무 아름다운 곳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섬이면서도 바다 특유의 짠내가 전혀 나지 않는다. 굳이 깊이 들어가지 않아도 목마르면 해변의 물을 손으로 떠서 마셔도 될 정도로 물이 맑다.
며칠 아무것도 안 하고 죽치고 있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세상이 돌아가거나 말거나 까맣게 잊어버리고 며칠 처박혀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뜨거우면 물에 들어가 헤엄치고, 힘 떨어지면 선베드에 누워 하늘을 이불 삼아 덮고, 그래도 허기지면 달콤한 과일 하나 베어 물면 나무꾼의 애간장을 녹인 선녀가 부러울까? 하루아침에 팔자를 고친 신데렐라도 그런 나를 시기하지 않을까?
계획에도 없던 섬 투어를 갑자기 하다 보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부랴부랴 오게 되었다. 지나는 길에 가볍게 눈인사를 나눈 레스토랑 직원에게 섬 이름을 물어보았다.
바쁜 점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식당은 한가로워 보였다. 보이쉬한 그녀는 기꺼이 꼼꼼하게 섬 이름을 적어준다. [Lopud] 섬이라고......
조용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섬 한 바퀴를 사부작사부작 돌다 보면 어느새 배로 다시 돌아와야 할 시간이다. 바다는 순해서 마치 호수인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배에서 같이 점심을 먹은 크로아티아 모녀와 같이 섬을 걸었다. 자다르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이 곳 두브로브니크 부킹닷컴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딸을 엄마는 엄청 자랑스러워했다.
점심을 먹는 내내 음식을 씹는 동안이 아니면 딸 이야기를 했다. 엄마가 딸을 자랑스러워하는 만큼 딸도 살뜰히 엄마를 챙겨주는 모녀의 모습이 부럽다.
이 모녀처럼 따뜻한 여행을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친정엄마를 보낸 주홍글씨가 가슴에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아이들도 웬만큼 자라고 조금 여유가 있을만하니 엄마는 인생의 무거운 등짐에 허리를 내어주고 1년을 누워만 지내시다 돌아가셨다.
부모는 자식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더니 엄마는 야속하게도 그걸 기어코 실천을 하시고는 막내딸 가슴 한 켠을 야무지게 꼬집어 놓고 가셨다.
자다르에서 혼자 여행 왔다는 그녀는 오전에 내가 급하게 달려와 배를 타는 모습을 보았다며 먼저 아는 척을 한다. 혼자 여행 온 여자들끼리 한동안 함께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니다 보니 혼자 다니는 것이 제일 편하고 좋다는 그녀와 어느새 한 개, 두 개 공통점이 찾아진다. 조용하고 과하지 않아서 나도 어느새 그녀가 오랜 친구처럼 점점 편하게 느껴진다.
여행을 나설 때 사람들은 혼자라서 심심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막상 혼자 다니다 보면 혼자이기 때문에 다양한 사람들과 편하게 접할 수 있어 오히려 좋을 때가 많다.
혼자라서 마음 가는 대로 여행할 수 있어 자유롭듯이, 그 자유로움이 좋아 혼자 길에 나선 이들이 많아 외롭지 않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를 만나 생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여행의 가장 진한 맛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