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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통의 편지

정심과 동주에게 띄우는 글

by 유주

편지에 대한 시 두 편!

1898년 생인 장정심과 1917년 생인 윤동주가 세월을 거슬러 담담한 듯 다감하게 편지를 주거니 받거니 띄운 것만 같다. 여태 답장을 못 받았을 그들을 위해 정성을 담아 서신을 전한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 편지


12월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올해는 왠지 눈이 금방이라도 내릴 듯합니다. 감기 녀석 덕에 가뜩이나 방콕 간 집순이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번 겨울은 눈 때문에 집안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게 생각하려 합니다. 설경은 유리창 너머로 뽀얗게 펼쳐져 있어야 낭만이 사는 거야 하면서요. 레트로 향수를 떠올리며 앙증맞은 난로 하나 옆에 끼고 따뜻한 차나 홀홀 마시며 가만가만 지내 보내렵니다. 정 심심하면 '닥터 지바고'나 '설국'을 눈에 담으며 말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사실 저는 달리는 기차 안에서 눈 덮인 산야를 바라보는 걸 참말로 좋아합니다. 차가운 맥주로 목을 간질이면서 말이죠. 노천온천의 뜨거운 탕 안에서 눈코입만 빠꼼하니 내놓고 펑펑 쏟아지는 함박눈을 맞는 건 더더욱 좋아하지요.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어야만 하는 건 좀 억울하긴 하네요. 지내다가 어느 눈 오는 날이면 저도 아기 주먹만 한 눈 뭉치 꼭꼭 접어 편지 한 통 띄울게요. 동주 오빠 계신 나라엔 눈 아닌 반짝반짝 해님과 보슬보슬 햇비만 있을 거 같아서요. 그럼 안녕. 전 이만 총총.




쓰자니 수다하고 안 쓰잔 억울하오
다 쓰지 못할 바엔 백지로 보내오니
호의로 읽어보시오 좋은 뜻만 씨웠소

장정심 - 백지편지


좋은 뜻으로 꽉 찬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제가 요즘 머릿속이 얽힌 실타래 마냥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다는 걸 어찌 알고 그런 편지를 주셨나요?

백 마디 말보다 더 위안이 되는 긴 여운 속에 말 못 할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새하얀 종이를 채운 공空을 보며 자신을 돌아보고 비워냈습니다. 세월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린 그간, 쌓이고 해묵은 감정이 꽤 되나 봅니다. 주신 공지 안에 죄 담아보았습니다. 친절한 마음 덕택에 훌훌 털어버릴 수 있어 얼마나 시원한지요. 언니 계신 그곳은 속상한 일 없으셨으면 합니다. 쓰자니 주변 없고 안 쓰자니 섭섭 가득합니다. 별말 쓰지 못할 바엔 백지로 보내올까 하다 몇 자 적어봅니다. 순정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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