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골짜기가 몰려든 얼굴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by 유주
반쯤 감긴 눈가로 콧잔등으로 골짜기가 몰려드는 이 있지만
나를 이 세상으로 처음 데려온 그는 입가 사방에 골짜기가 몰려들었다
오물오물 밥을 씹을 때 그 입가는 골짜기는 참 아름답다
그는 골짜기에 사는 산새 소리와 꽃과 나물을 다 받아먹는다
맑은 샘물과 구름 그림자와 산뽕나무와 으름덩굴을 다 받아먹는다
서울 백반집에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그는 골짜기를 다 데려와
오물오물 밥을 씹으며 참 아름다운 입가를 골짜기를 나에게 보여 준다

문태준 - 노모老母


이 시를 읽고 나서 열 살 딸아이를 은근히 불러 지나가는 말인 양 슬쩍 물었다.

"나한테 주름살 보여?"


큰 아이는 내가 기분 좋아할 말을 잘하기에 일부러 작은 애한테 물었다. 그 아이는 딱 부러지게 말하니까 내 얼굴에도 주름이 있는지, 나는 없다 믿고 싶었고 나를 사랑하는 아이의 눈에도 엄마의 주름 따위 보이지 않으리라 믿고 싶었다.

얼쑤, 정직한 아이의 말은 망설임 없이 날아왔다. "네. 있어요!"


음, 그렇구나. 나는 뻔뻔스럽게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어디에? 어디 주름이 있어?"라고 묻기에 이르렀다. "뭐, 많진 않고요. 코 옆 입 주변에 조금요." 순간 나는 뜨악했다. 요즘 나의 최고 콤플렉스인 팔자주름을 콕 집어 말한 게 아닌가. "음음, 그렇지? 참 나도 그 생각했는데"라며 애써 표정관리를 했다.

그러자 아이는 어떤 낌새라도 챘는지 "그래도 딴 덴 하나도 없어요."라고 얼른 덧붙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또 이마 정중앙과 눈 바로 밑의 살이 자글자글해지고 있다는 느낌은 그저 착각일 수도 있겠다며 한시름을 놓았다. 사실 말이지 내가 주름살을 따지게 된 건 한 줄 문장 때문이었다.


"중년은 이제 막 주름살이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입니다."


아, 나는 누가 뭐래도 중년인데. 그럼 주름살도 이젠 숨길 수 없다는 건가?!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시를 읽는다. 시인은 주름을 '골짜기'로 표현했다. 눈가로 콧잔등으로 입가 사방으로 골짜기는 몰려와 있지만 그래서 참 아름답다 말한다. 그 안에는 자연이 있고 시간이 깃들어있다. 지난 세월 속에 고스란히 들어차 세상 가장 고운 입 주변과 얼굴에 굴곡을 만들어냈다. 그 얼굴이 내 앞에서 한가득 미소 짓는다. 빛과 바람과 삶이 빚어낸 자연스러운 얼굴은 어머니의 얼굴이자 이제 곧 나의 얼굴이 될 것이다.


34.jpg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