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는 사십 대보다 이십 대에게, 사십 대에 들어선 사람은 삼십 대보다 오십 대에게 더 친밀감을 느낀다." 무척 공감이 가는 말이다.
삼십 대에는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나 한 번씩 놀라면서도 자존심이 그 숫자를 허락하지 않는다. 외모나 신체상으로 실감이 안 났다.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반 이상이라면 '아직 젊음'이란 당당함도 끼어 있다. 내 취향과 가치관, 정서와 감수성은 아래쪽 이십 대와 동급이기를 바란다.
가는 세월에 장사 없다고 원하거나 말거나 인간은 나이를 야금야금 먹는다. 사십 줄에 들어서니 '불혹'이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난다. 겨우 앞가림이나 하는 판국인데 세상일에 판단을 흐리는 법이 없다는 '불혹'이라니. 게다가 젊을 적 막연하던 그 단어는 얼마나 멀고 묵직한 연배였나. 예전에 마흔은 노년에 접어드는 시기라는 '초로'의 의미도 있었다는 걸 떠올리니 지나간 시절보다 다가올 시간의 무게감이 점점 커져 간다. 쉰이 오기 몇 해 전부터 그것은 데면데면한 친구인 양 내 삶 속으로 자꾸 파고들었다.
평균 수명이 늘어 '초로'는 요즘 50, 60대를 지칭한다. 기한이 별로 안 남았기에 슬슬 준비를 해야 마음이 놓인다. 여유와 휴식, 안정을 위한 노후 대비뿐만 아니다. 혹시라도 나이 때문에 망설이고 포기할지 모르는 심약함을 덜어내고자 한다. 매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필요하다. '내 나이가 얼만데', '역시 불가능해', '될 리가 없잖아', '남보기 부끄럽게',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이젠 늦었어'. 이렇게 갖은 핑계를 대며 머뭇거릴 일이 아니라 활기차고 기운이 넘칠 노년을 맞고 싶다. 사노 요코의 그림책 속 할머니처럼 말이다.
<하지만 하지만 할머니>에는 장장 90대의 매력덩어리 할머니가 나온다. 아흔여덟 인 할머니는 고양이와 함께 텃밭이 있는 작은 집에서 산다. 맨날 나이를 들먹이고 뿌루퉁한 표정을 짓던 할머니는 우연찮게도 아흔아홉 번째 생일 케이크에 단 다섯 자루의 초를 꼽고 생일파티를 하게 된다.
그러자 말끝마다 "하지만 나는 98살인걸."를 덧붙이던 할머니가 "하지만 나는 5살인걸.(당연히 초가 5개니까)" 외치게 되고 놀라운 변화가 뒤이어 일어난다. 할머니는 들판에서 나비같이 꽃 냄새를 맡고 새처럼 냇물을 풀쩍 뛰어넘더니 고양이가 된 듯 신나게 물고기를 잡는다.
"나 어째서 좀 더 일찍 5살이 되지 않았을까." 내년 생일에도 초 다섯 자루로 생일을 맞을 거라는 할머니.
미리 걱정하지 말고 장애물을 겁내지 말라고 깜찍한 행동으로 보여주는 할머니가 귀여워 빙그레 웃음 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흔한 메시지를 할머니만의 엉뚱한 개성으로 풀어낸다. 주어진 상황이나 처지를 탓하지 말고 몸으로 직접 부딪혀 삶을 느껴보라고, 그럼 살맛은 여기저기 어디에나 늘려 있다고 말하는 할머니라서 사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