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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꿀 때 빛나는 삶

말랑말랑하고 산뜻하게 노년맞이

by 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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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럼피우스』바버러 쿠니, 시공주니어(1996)/『엠마』웬디 케슬먼 글, 바버러 쿠니 그림, 느림보(2004)/『도서관』사라 스튜어트 글, 데이비드 스몰, 시공주니어(1998)


여태 살아온 삶 가운데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젊을 땐 시간 귀한 줄 몰랐고, 출산과 양육에 빠져 지낼 때도 시간이란 아무리 퍼내도 바닥이 안 보이는 우물과 같았다. 당장 하고 싶은 걸 못해도 언젠가 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기 싫어서 안 하고 상황이나 역량이 안 되어서 못할 뿐 시간에 쫓기거나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삶의 배터리 잔량이 반도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소모되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어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괜히 마음만 조급하다거나 뜻대로 되지 않아 불만스러운 건 아니다.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의 내가 후회할 만한 일은 이제 안 하고 싶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어쩔 수 없겠지만 내 의지로 가능한 부분은 바꾸고 인생을 가꾸며 살고자 한다. 현재에 충실하고 인생의 남은 단계를 준비하며 매 순간이 삶의 정점이 되기를 바란다.

현재 내가 나아가야 할 바를 떠올리다 보면 자연스럽게 노후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나는 어떤 할머니가 될까. 내 아이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진 할머니가 아닌 건가. 아마도 산술적인 나이와 생물학적 노화는 내가 조만간 할머니라는 걸 말해줄 테고 나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마음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 그럴 때 나는 내 노년의 이상향 같은 할머니들을 떠올린다.

우선 바버러 쿠니의 <미스 럼피우스>에 나오는 미스 앨리스 럼피우스가 있다. 그녀는 할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를 따라 젊은 시절에 온 세계를 두루 여행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자 바닷가에 정착해 새 집을 짓고 정원을 꾸며 꽃씨를 뿌린다. 이듬해 럼피우스는 우연히 바위투성이 땅에서 자라난 루핀 꽃을 발견하고 그다음 해에는 언덕 너머에 가득한 걸 본다. 기쁨에 찬 럼피우스는 들판과 언덕, 마을 곳곳을 다니며 꽃씨를 뿌린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할아버지와의 약속이기도 했고 그녀의 삶에 활력소가 된다. 그녀는 자신이 진심으로 원했던 일을 찾았고 그러자 아팠던 몸도 건강해진다.

그다음에 내가 닮고 싶은 할머니는 웬디 케셀만이 쓰고 바바러 쿠니가 그린 <엠마>에 나온다. 일흔두 살의 엠마 할머니는 아들딸, 손자, 증손자가 스물다섯 명이지만 홀로 지낸다. 가족들이 할머니를 찾아오기도 하지만 머무는 건 잠깐이기에 가끔씩 외로움을 느낀다. 어느 날 할머니는 자식들이 생일 선물로 사다 준 그림을 보다 엉뚱한 생각을 품는다. 그림 속 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자기가 직접 그려야겠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할머니는 기억을 되살리고 상상력을 보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현관 문턱에 쌓인 눈, 산 너머 작은 고향 마을, 꽃이 활짝 핀 나이 든 사과나무와 딱따구리, 햇볕을 쬐고 있는 고양이 등 할머니가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걸 그림에 모두 담는다. 이제 엠마 할머니는 외로울 틈이 없다.

자, 남은 한 명. 그녀는 데이비드 스몰이 그리고 사라 스튜어트가 쓴 <도서관>속에 산다.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어린 시절에 늘 책을 본다. 이불을 텐트처럼 세우고 손전등을 켜 둔 채 잠들 때까지 읽는다. 학교 기숙사에 가져갈 트렁크에는 책만 가득하다. 공부보다 데이트보다 청춘의 열기보다 좋았던 책 읽기. 어른이 된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머물게 된 마을에 집을 마련하고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리고 계속 책을 읽는다. 운동을 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청소를 할 때도 손에는 책이 들려있다. 결국 책이 넘쳐나자 그녀는 아끼는 전 재산을 마을에 기부하기로 결심한다. 집은 '엘리자베스 브라운 도서관'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서관이 되었고, 엘리자베스는 친구네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 어느덧 할머니가 된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마음과 뜻이 통하는 친구와 책을 읽고 도서관을 다니며 행복한 노년의 삶을 보낸다.

누구나 바라는 삶이 있을 것이다. 인생이란 게 내가 바란다고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나는 마음을 비우고, 부드럽고 가볍게 춤추고 노래하듯 살고 싶다. 무엇을, 누구를 탓하지 않고 공연히 바라지 않기를 원한다. 기분이 상쾌해지는 일을 하며 진정으로 몰두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살고 싶다. 나에게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서로 불편한 관계와는 거리를 두며 시공간에 넉넉한 여유와 향기를 간직하고 싶다. 작은 도움이나마 내가 줄 수 있는 일이 있기를. 내 곁에 함께하는 이들과 즐겁게 나눌 수 있는 일에 감사하며 더는 바랄 게 없는 노년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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