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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에서 희망을 노래한다

주변 어딘가 흐르는 시간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그것

by 유주
book12.jpg 『빨간 나무』 숀 탠, 풀빛 2019


농도를 가늠하기 힘든 슬픔이 진하게 녹아든 물 위에 작은 배가 떠돈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뒤집어지고 찢어질 종이배 안에 한 소녀가 웅크리고 있다. 검푸른 얼굴빛의 창백한 소녀는 헤어날 길 없는 우울에 빠져 있다. 뚝뚝 떨어지는 비에 머리가 젖어도 꼼짝 않는다. 살짝 손을 뻗으면 빨간 나뭇잎을 건져 올릴 수 있지만 거기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철학적인 삶의 언어를 그림에 담아 풀어내는 숀 텐의 대표작 <빨간 나무>는 표지 그림마저 보는 이를 울적하게 만든다. 면지로 넘어가도 별반 다르지 않다. 회색 우울이 짙게 배인 세상에 나뭇잎 한 장이 나풀나풀 날린다. 소녀가 뱉어내는 말은 파편화되어 문장을 이루지 못한 채 낱낱이 흩어진다. 그러나 빨간 나뭇잎은 소녀 근처에 있다. 주변 어딘가 흐르는 시간 안에 존재한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침대에 앉아 생각한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그때 천장에서 한 잎 두 잎 떨어지던 절망은 점점 쌓이고 모든 걸 파묻어버린다.

허겁지겁 방에서 벗어난 소녀는 무작정 걷지만 거리에도 불행의 냄새가 감돈다. 눈물을 흘리며 부패하고 있는 물고기가 소녀를 덮쳐버릴 듯 압도적이다. 세상은 귀머거리 기계, 마음도 머리도 없는 기계.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기다리는 일이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달라지는 건 없다.

소녀가 간절히 원한 건 '후회'에 가로막혀 스쳐 지나간다. '운명의 주사위'를 어떻게 던져도 냉정하고 잔인한 현실이 가로막고 있다. 나는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내가 있는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깜깜한 밤, 갈 곳을 잃은 소녀는 다시 방으로 돌아온다. 아침과 다를 바 없다고 느낀다. 하루의 시작과 끝, 어느 곳에도 희망 따위는 찾을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숱한 절망 속에 그녀가 발견한 건 빛나는 희망.

실은 희망은 소녀의 방황과 함께 있었다. 거리를 걸으면서부터 방에 들어가기 전까지 모든 장면에 숨어 있던 빨간 나뭇잎. 소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에 사로잡혀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책은 절망의 한가운데서 희망을 노래한다. 아픔과 슬픔에 젖어 살아갈 수밖에 없어도 그 시간을 묵묵히 견디다 보면 희망은 문득 내 앞에 피어오른다고 말한다. 마지막 면지는 온통 빨간 희망으로 가득하다. 작가의 소망처럼 우리네 삶이 꼭 그러하기를 나는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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