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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은 이야기를 싣고

저마다 간직한 사연이 궁금합니다

by 유주
book11.jpg 『나는 지하철입니다』 김효은, 문학동네 2016


어릴 적에 사람 구경을 못하고 자랐다. 내가 난 곳은 지역의 소도시로 읍, 면 단위의 촌은 아니지만 작은 뒷산이나 논밭이 있는 시골스러운 동네였다. 지금도 생생한 건 추수가 끝난 들판 여기저기 쌓여있는 볏짚 더미에서 놀았던 기억이다. 내 방인 듯 아늑하게 꾸미고 누워 뒹굴었다.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가 한참을 숨어 있기도 했다. 겨울에 논바닥이 얼어붙기 시작하면 엉덩이 젖는 줄 모르고 얼음 썰매를 탔다. 뒷동산에 올라가면 나뭇가지, 돌멩이, 흙무더기 등 별의별 자연물이 놀잇감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밥때는 언제인지 까맣게 잊고 노느라 바빴다.

소란 없이 흐르던 나의 유년기는 초등학교를 다니던 중간 무렵에 끝이 났다. 우리 가족은 대도시로 이사를 했고 나는 혼잡한 분위기 속에 다소 심심한 어른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이 조금 색다른 흥밋거리가 생겼는데 인파로 북적대는 장소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복잡한 버스 안, 시내 번화가, 대학가에서 나를 스쳐 지나가는 이들을 보며 독특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들의 행선지와 용무가 궁금했고 표정이나 옷차림, 행동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묘한 재미를 맛보았다.

한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 놀라움은 서울에 올라와 지하철을 타면서 더욱 커졌다. 행색만큼이나 다양한 성별과 연령층,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외국인들. 이들은 갑자기 어디서 쏟아져 나온 것인가. 모두 어디로 가며 누구를 만나고 무슨 볼 일이 있는가. 저마다 간직한 사연이 알고 싶어 유심히 살피기도 했다. 괜히 낯선 이에게 말 한마디 걸어볼 용기는 없었고 내 머릿속에서만 펼쳐지던 온갖 이야기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그냥 지나치지 못한 이는 나만이 아니었나 보다. 김효은의 그림책 <나는 지하철입니다>를 보는 내 입가에는 시종일관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왠지 흐뭇하고 가슴 따뜻한 시선이 공감의 울림을 전해왔다.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을 오르락내리락 빙글빙글 도는 지하철 2호선이 들려주는 얘깃거리에 귀가 솔깃해졌다.

예쁜 딸 한 번 더 보고 출근하느라 숨 가쁘게 뛰어 올라탄 남자, 딸과 손녀에게 줄 문어와 전복 보따리를 꼬옥 안은 할머니, 자기를 똑 닮은 아이의 손을 잡고 품에 안은 채 조심조심 오르는 여자, 당당한 발걸음의 구두수선공 아저씨, 학원을 돌며 공부하느라 몸과 마음이 지친 여학생, 지하철을 탄 사람들의 무심한 눈길에도 제 할 일 하느라 바쁜 잡상인, 고민 많은 청년 실업자.


그들을 어루만지는 오후의 햇살까지 가득가득 실어 나르는 지하철.

덜컹덜컹덜컹, 오늘도 달리는 지하철에는 흔하지 않은 이야기와 인간적인 정취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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