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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02. 2023

밤 12시가 되어도 마법은 풀리지 않는다

내 이름이 되는 신데렐라 이야기

『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닛 글, 아서 래컴 그림, 반비 2021.
"그거 제 신발이에요."


유리 구두 한 켤레가 케이크 가게 진열장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뭐! 케이크 가게라고?

신데렐라 이야기에 느닷없이 케이크 가게가 왜 나오는 것이며 신분 상승의 치트키인 유리 구두 왜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가?


누구나 신데렐라의 변신을 꿈꾼다. 그건 백마 탄 왕자가 짜잔 하고 나타나 수리수리 마수리 뿅 결혼식을 올리는 환상적인 마법이다. '어제의 나는 잊어주세요' 여봐란듯 하루아침에 팔자가 바뀌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그러나 리베카 솔닛은 신데렐라의 변신을 수직 상승이 아니라 수평 이동으로 완성한다. 그 시작은 밥하고 빨래하며 신세 한탄하는 눈물바다가 아니었으며 자님이 유리 구두를 들고 제발 나타나길 바라는 수동적인 기다림은 더더욱 아니었다. 


똑 결연한 눈물 세 방울과  "누가 날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라는 구체적인 부탁이 선행되었으며 요정이 내민 도움의 손길을 흔쾌히 수용하고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성사되었다.


신데렐라는 대모 요정이 무도회에 가고 싶냐고 묻자 "네!" 하며 망설임이 없었고, 그렇다면 타고 갈 걸 마련해 주겠으니 호박 하나를 가져오라는 말에 자기 힘으로 들 수 있는 가장 큰 호박을 골라왔다. 마차꾼이 필요해 보이자 커다란 회색 쥐 한 마리가 있는 쥐덫을 들고 왔으며 여섯 마리의 말로 변한 생쥐들과 말구종이 된 도마뱀들과도 스스럼없이 협력 관계를 맺었다. 무도회장에서 만난 왕자가 유리 구두 한 짝을 들고 찾아왔을 때 "그건 바로 내 신발"이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마법이 대모 요정의 전적인 베풂에서 신데렐라의 적극적인 행동으로 전환되자 더욱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난다. 예상대로 유리 구두는 신데렐라의 발에 딱 맞았고, 이제 왕자의 달콤한 프러포즈가 이어져 성대한 결혼식을 올릴 거라는 뻔한 결말은 뒤집어지고 두 사람은 부부가 아니라 친구가 된다.


"가끔 내가 왕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너무나 당연시되었던 고정관념은 왕자에게서도 어김없이 깨진다.  

태어나 전부터 뭐든 풍족하게 가졌던 왕자는 신데렐라가 "당신 꿈이 뭐예요?"라고 묻자 깊은 고민에 빠진다. 사실 왕자는 대단한 꿈이 없었다. 모든 걸 완벽하게 가져서라기보다는 의무와 구속으로 가득찬 삶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가장 자기다운 모습이 무엇인지 몰랐다. 


"왕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라는 그의 말은 뭐 하나 부족함 없는 이의 배부른 소리가 아니었다. 아무런 노력 없이 물려받은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세상을 자유롭게 경험해 보고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땀 흘려 일하는 가운데 영혼이 충만해지는 보람을 희망하는 진심 어린 고백이었다. 신데렐라와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과수원에서 사과를 직접 따보며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깨닫게 된 왕자는 부모님에게 자기 생각을 말하기로 결심한다.


한편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 씩씩하고 기운 센 사람이 된 신데렐라는 시장 사람들과 친해져 요리에 재미를 붙이더니 솜씨 좋은 요리사가 된다. 대모 요정의 조언을 받아 새어머니에게서 독립을 하고 꿈이었던 케이크 가게 주인이 된 것이다. 유리 구두는 진열장에 가지런히 올려두고 큰 발에 어울리는 튼튼한 부츠를 신은 그녀는 가게를 운영하거나 생쥐였던 회색 얼룩무늬 말을 타고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 쿠키를 구워 동네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자유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구도 부모가 어떤 사람이라서 더 훌륭하고 더 중요하다거나, 부모가 나쁜 사람이니 자식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어. 누구든 자기의 말과 행동만큼 훌륭하고 중요한 거니까.


새 언니들에 대한 편견도 전복된다.

신데렐라보다 더 많이 가졌고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늘 생각했던 그녀들은 새어머니의 치맛바람에 폭 감싸여 이리저리 휘어지던 나뭇가지였다. 한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머리 모양을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틀어 올렸고 또 한 언니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으려고 온갖 리본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그녀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되면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었다. 마을 사람들을 무시하며 어울리지 않았고 머리와 옷에 온갖 신경을 쓰느라 허송세월을 했기에 발목은 나뭇가지처럼 가늘고 발은 작아 왕자의 유리 구두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은 엄마가 아니라 신데렐라를 보며 바뀐다. 집에 가만히 앉아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원하는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 미용사와 재봉사가 된다. 신데렐라에게 함부로 했던 지난 시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자기다운 삶을 살게 된다.


모두 자기다운 사람이 되었고 새어머니도 그렇게 되었어.


신데렐라의 새어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모 요정과 새어머니는 둘 다 신데렐라의 친모가 아니었지만 그들이 신데렐라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달랐고 결정적인 건 바로 생각의 차이였다.

새어머니는 '모두가 모든 것을 누릴 수는 없으니 자기 몫을 챙기려면 다른 사람의 것을 가져와야 한다'고 했지만 대모 요정은 '제대로 나누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몫은 언제나 넉넉하다'고 말한다.


"더 더 더 더" 혹은 "내 거야 내 거야 내 거야"

내 마음의 불안과 이기심이 내는 소리는 폭풍우 치는 날 새어머니의 울부짖음이었고 소유욕과 인정욕구로 괴로운 마음은 그녀가 일으키는 굶주린 바람이었다. 가끔은 내 안의 새어머니가 소란을 피우며 온통 뒤흔들어 놓겠지만 그때면 내 안에 대모 요정이 나타나 헝클어진 마음을 가만가만 쓰다듬으며 느긋한 사람이 되도록 마술 지팡이를 가볍게 톡 하고 쳐 줄 거라 믿는다.


"이 일 할 때가 제일 즐겁다니까."


이 책에는 원전의 유명한 장면이 빠졌다. 신데렐라는 밤 12시가 되면 자동으로 마법이 풀리지 않는다. 대모 요정은 생쥐들과 도마뱀들, 신데렐라에게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으냐고 돌아가며 묻는다. 덩치 좋은 말의 모습으로 무서움 없이 살고 싶은 다섯 마리 생쥐와 마차꾼으로 남아 모험을 하고 싶다는 큰 생쥐, 그리고 아기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쥐, 원래의 모습으로 사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는 도마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원하는 대로 해준다. 신데렐라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가 아니라 낡은 옷차림을 원했고 이제 그녀 앞에는 궁핍과 서글픔이 아니라 넘치는 자유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누리는 즐거운 일상이 펼쳐진다. 


곤란에 처한 이를 향한 선의와 선뜻 베풀 줄 아는 호의,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아량은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찾아갈 수 있게 도와주는 대모 요정의 마법 같은 선물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제 신데렐라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대. 이제는 다들 원래 이름으로 불러. 이렇게. 엘라.


신데렐라에게 마법 지팡이는 없지만 그녀는 삶 속에서 마법을 행하는 해방자가 된다. 그 말은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벗어남'이었다. 얽매인 모든 것에서 헤어나고 모두를 자유롭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한계와 굴레에서 벗어나 꿈을 찾고 주변인들을 돕는 해방자가 된 신데렐라!  

하지만 서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왕자는 신분의 속박에서, 두 언니는 어머니의 간섭에서 해방한다. 관습, 편견, 고정관념, 영향력, 욕망 등에서 벗어나 자기다운 삶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들의 모습은 짜릿하고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마법이란 주변의 도움과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건강한 변화"라고 말해주는 새로운 이야기. 

지나친 겸손이나 자존심을 떨치고 도움을 부탁하거나 감사히 받을 줄 아는 마음의 여유, 힘든 일에서도 즐거움을 찾으며 과시가 아니라 자부를 느끼는 떳떳함을 가진 존재가 진정한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 오래된 상상 속 꿈과 환상의 신데렐라가 나에게 실현 가능한 인물로 성큼 다가온다. 마음먹기에 따라 행동 여부에 따라 변신과 마법은 내 앞의 생생한 현실이며 신데렐라는 다름 아닌 나 자신의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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