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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Jan 05. 2024

어떤 순간에도 손을 잡아야 한다

외롭고 추운 영혼이 없도록 지켜주는 따스한 손길   

꿈을 꾸었다. 수채화처럼 단 하나의 장면이 선명해 맑고 투명한 물맛이 났다. 내 앞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내 손을 꼬옥 잡았다. '아! 사람의 손이란 게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구나. 맞닿은 서로의 마음이 이토록 포근포근 따뜻하게 전해지는구나.' 나는 애인이나 혈육이 아닌 이의 손에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꿈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잠이 깬 다음날 남편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당신 친구 OO이 내 꿈에 나왔어. 내 손을 잡았는데 너무 부드러웠어."

그 말을 듣는 남편의 얼굴에 빙그레 웃음이 떠올랐다.




지난봄 남편은 친구들 모임에 다녀와서 내게 OO의 근황을 말해줬었다. 사십 대 초반 밖에 안 된 아내가 치매에 걸렸다고 했다. 큰 아이는 한창 예민한 중2고 작은 애는 초등학생이었다. 입원이나 수술로 해결될 병이 아니고 그저 평생 약을 먹을 수밖에 없는데 상태가 아주 중한건 아니어도 수시로 깜박깜박해서 혼자 밖을 나가거나 다른 아내들처럼 집안일을 척척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 OO도 건강검진을 받고 자기가 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초기였고 수술 뒤 예후도 좋았지만 잠깐이라도 일을 쉴 수가 없었으며 아내가 할 수 없는 집안일까지 해야 했다. 아내와 애들 건사하며 먹을 걸 챙기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양육과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인데 자기 몸을 돌봐야 할 사람이 그 모든 걸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마음이 무척 아팠다.


연애를 할 때 나는 남편 친구들이 만나는 자리에도 종종 따라갔었기에 OO과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쉰이 넘은 남편의 친구들 중에는 아직 결혼을 안 한 이들도 있는데 OO이 늦은 결혼에도 열 살이나 어린 아내를 얻어 부러움을 샀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러다가 나는 몇 년 전 시아버님 장례식장에서 OO을 오랜만에 만났다. 나에게 아이들 사진을 보여주면서 너무 예쁘다고 얘네들 때문에 산다고 환하게 웃던 게 생각났다. 그땐 아내의 병이 발발하기 전이었을 테고 아이들 키우는 재미에 폭 빠져 지낼 때였지만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의 역할이 무거운지 결혼 전에 비해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고 웃는 얼굴에 왠지 모를 그늘이 져있었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영영 돌아오지 않을 시간이 스쳐 지나가는데 왜 이렇게 바쁘게 주위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사는지 모르겠다. 문득문득 친지나 친구들을 떠올리지만 그 떠올림이 시공간 속에 머물러 전화를 걸거나 만남의 형태로 이어지는 일은 거의 없고 매번 눈앞의 다른 일에 묻혀버리고 언제 떠올렸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너무 안일하고 쉬운 선택만 하고 사는 건 아닐까. 남편에게 들은 이야기 속 OO의 얼굴은 결혼 전에 본 얼굴, 몇 년 전 장례식장에서 봤던 얼굴이 되었다가 남편이 얼마 전에 찍었다면서 보여준 사진 속 지금의 얼굴과 겹쳐졌다. 세 얼굴은 바로 꿈에 나왔던 하나의 얼굴이지만 그 사이에는 20년의 간극이 있었다. 그 세월이 정말 순식간에 흘렀다.


남편이 연말에 친구들과 만나는 약속을 잡았다고 했다. 새벽에 일어나 일 나가는 남편이 아침대용으로 곧잘 먹는 떡을 사러 간 김에 OO의 것과 같이 만나기로 되어 있는 다른 친구의 것도 사서 저번에 남편 손에 들려 보낸 적이 있는데 그걸 안 넘어가는 밥 대신 너무 잘 먹었다길래 또 달려가서 두 박스 샀다. 목이 막히면 안 되니까 식혜도 큰 통으로 한 개씩 끼워 넣었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 쇼핑센터에 갔다가 OO의 애들이 좋아할 만한 쿠키 세트도 한 통 사서 집어넣었다. 그냥 별 것 아니지만 뭐라도 챙겨 주고 싶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남편은 빈 손이 아니었다. OO이 고맙다며 우리 애들 먹을 케이크까지 사서 보낸 것이다. 아니 왜 그걸 받아왔냐며 입을 삐죽하는 나에게 남편은 음식 사진과 친구들이랑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이야기보따리 풀어놓기 바빴다. 술과 담배를 끊고 건강 관리를 하는 OO을 위해 몸에 좋은 음식을 미리 물색해 가서 해신탕을 먹였다고, 우리가 갔던 파주에 있는 식물원 카페에 데려갔더니 너무 좋다면서 조만간 아내 데리고 와야겠다는 말을 했다고, 김포에 있는 맨발로 걷는 황톳길에 대해 알려주니 그런 곳이 있냐며 날이 풀리면 아내와 꼭 가야겠다는 말을 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남편은 신이 나 보였고 그걸 듣는 내 기분도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CT 예약이 되어 있어서 대학병원에 다녀왔다. 이상하게 나는 병원에 가면 그 어느 때보다 겸손해지고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고 병원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걱정되고 어서 건강해지길 저절로 빌게 된다. 이번에 한 검사 결과는 바로 나온다길래 외래 진료실 앞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여자분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네, 엄마 모시고 병원에 와 있어요. 아빠요? 아빠는 요즘 아무것도 안 드시고 잠만 주무세요. 네, 계속 잠만 주무세요. 휴우"라고 말하는 그분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옆을 보니 연세 지긋하신 할머니가 가만히 딸을 바라보고 계셨다. 잠만 자는 아빠, 곧 영원한 잠에 빠지실 텐데 숨 쉬고 있음에도 잠만 잘 수밖에 없는 몸과 정신이란 어떤 것일까. 갈 길을 잃고, 가야 할 의미를 잃고, 한없이 어둡고 깊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그 누구를 상상하며 나도 모르게 나의 현재를 꽉 움켜쥐었다.


아직은 건강하다. 특별한 병도 없고 무탈하다. 하지만 내일도 그럴 것인지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병원을 나와 신호 대기를 하고 있는데 백발의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병원을 나와 서로에게 의지하며 천천히 횡단보도를 건너가시는 모습이 보였다. OO이 아내와 함께 카페에 가고 황톳길을 걷겠다고 한 말이 머릿속에 메아리쳤다. 아플 때마다 늘 내 옆에서 손을 꽉 잡고 병원에 데려가 주던 남편 생각이 났다. 사랑하는 이들을 돌보고 지키는 영혼들은 그 무엇보다 무한한 감동을 준다.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어진 삶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덧붙임: OO은 나보다 두 살 연상이지만 편의상 호칭을 생략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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