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주 Jan 12. 2024

숨기와 몰래 보기

자초한 고립과 노출 기피의 역설에서 비상하다

차가운 세수를 하고 거울에 비친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젖은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윗옷을 적시는 줄도 모른다. "누구니? 넌 도대체!" 내가 익히 아는 눈, 코, 입의 조합이지만 처음 보는 조형물을 내던져 뭉뚱그려놓은 생소한 형상이다. 낯선 타자를 마주한 기분은 저릿한 둔통이 되어 전신으로 번져간다.  


어쩌면 오래된 싸움이다. 드러내기와 숨기의 줄다리기랄까.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 좀 봐줘!" 보여주고 싶어 안달하며 드러냈고 "제대로 보고 있기는 한 거야?" 급하게 마음을 확인하느라 동동 발을 굴렀다. 상대방이 "그대는 정말 열정적이야."라며 화사한 붓꽃을 닮은 웃음을 얼굴에 덧칠해 주었지만 외골수의 애정과 집중은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의 가슴에 끈끈한 점액질의 자국을 남겼다.


야밤의 고속화도로를 달려 신나게 질주하던 우쭐거림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서서히 속도를 줄여 앞 유리에 비친 나의 얼굴과 동시에 겹쳐지는 누군가의 얼굴을 빤히 내다본다. 기억을 간직한 무의식은 보호하고자 하는 자아와 인정을 거부하고 싶은 타자를 와이퍼로 박박 닦아 지워낸다. 다시 달려 나는 어딘가로 숨는다. 더 이상 인간적이지 않은 너와 나로부터.


숨기; 세상을 밝히던 애정은 하찮은 경멸을 축으로 왔다 갔다 왕복운동을 한다. 보이면 안 된다는 강박이 노출을 기피하고 어둠 속에서 하얀 눈만 깜박 깜박이며 축축하게 젖은 액정을 응시한다. 거기엔 어느 순간 싸이월드가 있더니 다음카페가 있었고 MSN 메신저가 자리했다. 지금은.....


몰래 보기; 한 장의 사진, 몇 줄의 글로는 절대 없는 온갖 것을 추측한다. 불멸의 저주받은 정신이 밤의 침묵에 말뚝을 박고 자취를 감춘 육신은 안전하다며 숨을 토해 내더니 들끓는 상상이 연달아 비명을 내지른다. 압도적인 무게에 내 몸이 짓눌려 납작해지고 '만약에'라는 부질없는 가능성을 되새김질하며 오도 가도 못하는 미로에 눈뜬 장님으로 헤맨다. 충족되지 않은 영혼에 깃든 건 무엇인가. 달라지지 않은 연민이 아프다.


추억하기; 그 사람, 사람, 사람. 내 사랑, 사랑, 사랑이 바로 저기에 있다. 남자일 수도 여자일 수도 있는 인간의 몸을 가진 이.  안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기억에서 삭제하고 싶지만 계속 머물기를 바라는 존재의 무게감이란. 정말 여기까지 인가. 되돌려지지 않는 후회가 델 듯이 뜨겁다. 다 쓰고 난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는 건 무엇인가. 깃털만큼 가볍고 먼지보다 사소하게 날려 버리고 싶지만 변하지 않는 미련이 답답하다.


내 의식의 한구석에 파에톤이 있었다. 그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이지만 자신이 사생아인 줄 알고 자랐다. 청소년기가 되어 자기 아버지가 태양신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당장 온 천하에 증명하고 싶어진다. 그간의 세월과 외로움에 대한 억울함을 보상받고자 그는 헬리오스에게 소원을 빈다. 부디 아버지의 태양마차를 하루만 직접 몰게 해달라고. 안 되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아낸 파에톤은 자기가 신이라도 된 만용을 부렸고, 마차를 제대로 조종하고 제어하지 못한 벌로 제우스의 벼락을 맞는다. 산산조각이 난 마차, 그리고 새까맣게 그을려 강으로 떨어진 파에톤.


자신감이나 정체성이 결여되어 타인의 시선과 인식에 과민반응하는 자아, 상대의 반응에 갈 곳을 잃어 흔들리고 순식간에 부정적으로 축소되는 상태, SNS에 있는 글과 사진에 몰두하는 감정이 파에톤 콤플렉스를 파생시켰고 그건 내 삶의 한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착과 고집이 시간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은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다. 살아보니 과거는 그저 기억의 재구성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되고 기억의 상대성도 이해하기에 이른다. 연연하기보다 잊고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도 안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 훔쳐보지 않을 작정이다. 나와 함께 할 수 없는 삶은 흘려보내라고 한다. 내 신경은 앞에 놓인 시간에 더 열중하고 아직도 타자 같은 자아를 알아가는 노력으로 콤플렉스를 박살 낸다. 시시포스처럼 무의미하게 반복하지 않을 테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며 홀로 무작정 표류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고립의 공허함을 몸에 멋들어지게 걸치고 고독의 쓴 맛을 꿀꺽 삼켜 정신의 부활을 꿈꾼다. 


비상하기; 결국 파에톤은 추락했다. 그건 새의 깃털과 밀랍으로 날개를 붙이고 하늘로 날아올랐던 이카루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겁 없이 도전했고 불가능을 욕망했으며 저 높은 곳으로 거침없이 도약했다. 태양을 향해 뛰어든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불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모순이 있다고 그 안에 역설의 진리가 없겠는가. 추상의 실체성을 감히 실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결핍에 칼을 맞대고 대립하지 않는다. 잉여의 잔에 샴페인을 가득 채운다. 파에톤을 사랑한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이전 07화 어떤 순간에도 손을 잡아야 한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