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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29. 2023

굳이 가야 vs 굳이 자야

순응하느냐 불응하느냐 그것이 문제이지만

"술 더 안 먹고 굳이 가려고?"

형님이 계속 물어보신다. 


나의 친정에는 없고 시댁에는 있는 것! 친정 식구들은 생각도 안 하는데 시댁 식구들에겐 너무 당연한 것! 내가 시집와서 뜨악했던 것! 그건 두 가지였다.


일단 '술'


우리 시댁은 술을 정말 좋아한다. 못 마시는 사람이 없다. 마시는 걸 즐기기도 하지만 간 기능 하나는 유전적으로 타고 난 듯 끝없이 마시고도 끄떡없다. 남편이 8남매 중 막내이니 워낙에 대식구이기도 했고 공사가 다망하신 아버님은 집 안팎의 술자리에 안 끼시는 데가 없었고 어머님은 손이 커서 뭘 만들었다 하면 음식이 넘쳐났는데 그걸 핑곗거리로 딸, 아들, 사위, 며느리, 손주들 불러 모아 먹고 마시고 흥청흥청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그렇게 즐기셨다. 한 상 가득 차리고도 다른 음식, 또 다른 음식을 내어왔으며 맥주든 소주든 궤짝으로 쌓아놓고들 마셨다. 뭐든 아끼고 모아두기 보단 있는 걸 싹싹 긁어서 꺼내고, 없으면 빚을 내서라도 먹고 마시는 걸 삶의 낙으로 살아온 가족사였다. 다음을 기약하는 건 항상 아쉬운 일이었고 당장이 중요하지 내일은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살아온 나의 시댁 식구들.


반면 우리 친정 아빠는 외아들인 데다가 고모들은 사는 게 구차해서인지 무슨 일로 빈정이 상해서인지 서로 어울리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았고 아빠의 사고 후로는 자연스레 막냇동생네로 발걸음을 하지 않으셨다. 영천에 있는 큰 고모네 사과 과수원에서 보낸 나의 유년기는 지금도 몽글몽글 그리움을 불러일으키긴 하지만 명절이나 제삿날에는 늘 엄마와 아빠 그리고 우리 삼 남매만 적적하게 보냈던 기억이 난다. 음식에 술을 곁들이는 건 특별한 경우였고 이것도 유전인지 모두 소식가라서 디저트까지 자기가 먹을 양을 채우고 나면 깔끔하게 상을 치웠다. 낭비를 싫어해 뭐든 아끼고 절약하고 저축하면서 사는 게 삶의 낙이었고 술 기운에 의지하기보다는 맨 정신으로 좋아하는 걸 사부작사부작하면서 자기 시간을 살뜰하게 챙기며 살아온 이들이 나의 친정 식구였다.


다음으로 놀란 건 '잠'


나는 수면장애가 있다. 늘 자던 곳이 아니면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시댁, 친정뿐 아니라 여타 친지들의 집, 여행지, 심지어 안방 침대가 아닌 다른 방에서 자게 될 때도 뒤척이다가 잠에 빠진다. 수면등을 포함해 어떤 불이든 말할 것 없고 텔레비전 소리도 나에겐 꿈나라 불청객이다. 맨날 자던 침대, 익숙한 침구, 어둡고 조용한 분위기에서 나는 숙면을 취할 수 있는데 사실 이런 기질은 친정 엄마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엄마는 나보다 중병인데 기차나 버스를 타고도 잠을 못 이루신다. 대여섯 시간을 이동해도 말똥말똥 창밖만 보시고 집에서도 수면유도제 없이는 잠을 못 주무신다. 

   

그런데 나의 시댁 식구들은 술을 타고난 것처럼 잠도 타고났다. 그들은 좁디좁은 집에 복작복작 모여 먹고 마시고 다닥다닥 붙어서 함께 잠든다. 잘 데가 없어서 현관문 바로 앞에서 신발을 베고 잤다거나 베란다에서 장독대 끌어안고 잤다는 말은 새삼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아무리 대낮처럼 불을 켜 놓아도 텔레비전 소리가 스피커로 짱짱 울려대는 것 같아도 드르렁 코를 골며 세상모르게 자던 그들은 인체의 신비를 가진 존재였다.


나는 환경적 혹은 심리적 불면증을 극복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자발적 불면증을 궁리해 내기에 이르렀다. 시댁에 가기 전에  일부러 불면의 밤을 보냈는데 밤을 꼴딱 새워보기도 하고 두세 시간만 잠깐 눈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면 그날 밤은 어디에 가서든 어떤 분위기든 잠을 못 잘 까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렇게 해도 선잠 밖에 못 자는 나 역시 인체의 신비를 가진 인간인가, 아님 그냥 인간 승리인 건가. 웃픈 현실이지만 하기야 자주 있는 일은 아니라서 신비도 승리도 추억담이 될 수 있었다.


나는 남편에게 잠머리(머리만 대면 자니까)가 있어서 부럽다고 말하곤 하는데, 잠머리 히어로급들이 우리 시댁에 다 모여 있었던 셈이다. 하다못해 그들은 새벽 5시만 되면 알람 없이도 눈을 번쩍 뜨는 기인이기도 했다. 아무리 거나하게 취해 잠이 들어도 새벽에 일어나 텔레비전을 틀고 밥을 안치고 부산을 떠는 그들은 히어로인가 빌런인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그러다가 결혼한 지 20여 년이란 세월이 다가오니 나도 그들에게 빌런 아닌 빌런이 되어 보기로 한다. 성화에 못 이겨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먹다가 술병이 나길 예사였고 자발적 불면증까지 강구하며 적응하느라 애써 온 지난 나날이었지만 이제 나는 불편한 걸 감수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 술 권유 없이 맛있게 식사를 하고 편안하고 익숙한 잠자리에서 푹 자고 싶다. 방해 없이 개운하게 일어나 상쾌한 아침을 맞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나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남편도 마찬가지다. 빡빡한 직장 생활의 고단함을 주말 아침마다 운동으로 푸는 남편은 술을 마시기 위해 자야 하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말한다.

"형님, 굳이 자야 돼요?"


추석과 설날에는 음식 준비를 하고 다음날 일찍 차례를 지내야 되니까 같이 잘게요. 하지만 다른 날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할래요. 각자 술 보다 더 중요한 무엇을 위해 춥고 어두운 밤 집으로 향하는 남편과 나의 마음을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환하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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