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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주 Dec 22. 2023

밤은 더없이 깊어갈 때

노을과 맥주가 시시로 찾아오는 시간

나의 둘째 형님은 지난봄에 남양주에서 가평으로 이사를 했다. 남양주 아파트에서 가평의 주택으로 보금자리를 옮기신 거다. 가평행을 결정한 건 형님의 친정 부모님이 운학산 언저리에 터를 잡고 오래 살아오셨던 터라 늙으신 부모님 곁에서 농사일을 도와드리며 보살펴 드리고 싶었고 무엇보다 아파트 생활에 염증을 느꼈던 원인이 컸다고 한다.  


형님의 경우에는 층간 소음이 아닌 벽간 소음이 스트레스였다. 형님네 안방은 옆집 화장실과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었다. 말소리는 물론이고 씻고 양치할 때 나는 소리 심지어 소변보는 소리, 방귀소리까지 적나라하게 들렸다고 한다. 알고 싶지 않은 옆집 할아버지의 기척이 너무나 생생해서 싫었고 그걸 차마 말씀드릴 수 없어서 참다 참다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는 속사정이 있었다. 


형님부부는 일단 괜찮은 땅을 물색한 후에 건축사 사무실에 설계를 맡겨 원하는 구조로 직접 집을 지으셨다. 층고가 높은 단층 주택이었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작은 다락이 있었으며 크지는 않아도 마당이 있어서 형님이 좋아하는 꽃이며 푸성귀도 직접 재배할 수 있다며 반색을 하셨다.


원하던 집에서 살게 되자 형님은 매일 퇴근 시간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따뜻한 계절에는 해가 길어서 퇴근해 집에 와도 환했고, 조금 어둑어둑해지는 밤 날씨마저 좋아서 마치 정해진 코스인 마냥 베란다에 나가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눈앞에 우뚝 솟은 푸르른 산에 밤그늘이 차오르는 것과 바람에 살랑 떠밀려 가는 장밋빛 양털 구름, 새빨간 저녁노을에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이 참 행복해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그걸 보며 똑하고 따서 들이키는 맥주 한 캔이 말도 못 하게 맛있어서 숨을 못 쉴 것만 같았다고 한다.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형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의 잊을 수 없는 노을이 문득 생각났고 가장 눈부셨던 맥주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에는 매일 의무적으로 야간자율학습을 했는데 특히 시험을 한 주 앞두고 있을 때면 학교 전체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누구 하나 잠을 잔다거나 딴짓을 할 겨를이 없었고 그저 교과서나 문제집 넘기는 소리만 공기 중에 가득했다. 일분일초가 아까워 모두 공부에 파고들 때 나는 혼자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곧 사그라질 태양의 열기가 학교 외벽에 스며드는 순간 대기에는 온통 노랗고 붉은 기운이 차 올랐고, '이젠 해가 기울겠구나, 저 해는 금방 저 산 뒤로 숨겠구나, 저 아름다운 모습이 내 눈앞에서 사라지고 금세 어스름이 깔리겠구나' 막연히 생각하는 내 마음은 왜 속수무책으로 미어지고 아프면서 두려웠을까. 


'아니, 노을이 저렇게 아찔한데 저토록 놀라운 일이 펼쳐지고 있는데 왜 얘네들은 책만 들여다보고 있을까' 내 마음은 속상함으로 들끓었고, "저기 좀 보라고! 저 아름다운 것 좀 보라고!" 옆에 앉은 친구의 옆구리를 찔러도 시큰둥하게 힐긋 바라볼 뿐 별 감흥 없이 바쁘게 공부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니 그 아이가 낯선 건지 나 자신이 낯선 건지 몰라 나도 모르게 쓸쓸해졌다. 


짧은 찰나 찬란했던 색의 향연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땅거미가 내린 창문 너머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아질 즈음에야 침침한 형광등 아래 오도카니 앉아 입술을 깨물며 초조해하는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세상과 씨름하고 지지 않겠다며 분투하는 나의 마음은 점점 고난해졌지만 대학의 문을 사뿐히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시간 아까운 줄 모르고 흠뻑 젖어든 대학의 낭만 끝에는 길고 어두운 동굴 저 멀리 취직이라는 결승선만이 희미하게 보였고 주변의 친구들은 어느새 또 책에 코를 박고 있었다. 나는 겨우 달렸고 취업을 해서 서울로 상경했다. 


그러나 입시 보다 더 치열한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는 지쳐갔다. 그 시절 나에게 큰 의지가 되어준 사람은 고등학교 친구였다. 하숙을 하는 나에 비해 자취방을 얻어 살고 있던 그녀의 형편이 더 나아서 나는 자주 친구의 방에 놀러 갔었다. 어느 겨울 우리의 젊은 토요일 밤, 직장인의 고충과 타지 생활의 외로움을 나누며 친구와 나는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벽녘에 잠이 들었고 다음날 점심 무렵에야 정신을 차렸는데 왠지 모르게 서름한 빛이 느껴져 창문을 내다보니 밤새 내린 폭설로 온 세상이 설국이었다. 


가만히 서로를 마주 보던 우리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헤치고 대중목욕탕으로 달려갔다. 빨갛게 얼어붙은 볼과 손, 발을 김이 무럭무럭 나는 탕에 담그고 따갑고 뜨거운 기운을 온몸으로 찌릿찌릿 느꼈다. 자욱한 열기 속에서 때를 불리고 우리는 희미하게 웃으며 주거니 받거니 서로의 등을 밀어주었다. 숙취와 피부의 묵은 찌꺼기를 벗겨낸 우리는 개운한 기분이 되어 뽀드득뽀드득 깊숙이 눈을 밟으며 친구의 집으로 다시 향했다. 


아! 골목을 돌아 선 우리의 눈앞에 기다렸다는 듯 슈퍼가 있었고 우리는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우리의 손에 들려 나온건 차가운 맥주 두 캔! 


눈으로 덮인 고요한 세상에는 일요일이 서서히 다 가고 있다는 불안과 낮과 밤의 순서가 바뀌고 있다는 공허함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만큼 힘들어하는 존재가 있다는 안도감, 그 존재는 바로 내 곁에 있다는 따스한 위로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건배했다. 목욕 후의 갈증과 눈의 냉기, 삶의 허기를 단박에 해소시켜 준 그 맥주는 내 인생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최고의 맛이 되었다.


나의 어떤 삶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황홀한 노을이 있었다. 산다는 이유로 어지러운 기분을 어루만져주는 맥주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과 이 세상에게 버림받지 않았다는 기분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형님은 시골 주택에서의 첫겨울을 맞는다. 큰 아들은 독립을 하고 작은 아들은 군대에 가서 남편과 둘이 소곤소곤 살게 되었다. 형님에게 고민이었던 소음은 옛 일이 되고 이제 맥주를 마시며 한껏 신나서 들썩들썩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흥청거리며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이내 조용하다. 큰 아주버님은 안마의자에 앉아, 두 고모부님은 소파에 앉아 까무룩 잠이 드셨다. 


바깥세상은 눈에 덮여있고 모든 것은 얼어붙었다. 형님의 노을과 맥주는 나의 노을과 맥주로 갈마들며 겨울밤이 묵묵하게 깊어만 갔다. 그렇게 우리는 오늘을 잃으며 내일을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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