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azy Homecoming Bonfire Tradition
전통이 많은 것으로는 어디서도 빠지지 않을 다트머스! 그중 특히나 큰 행사가 많은 가을 학기의 최대 축제는 다름아닌 홈커밍인데, 홈커밍 전통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통 중 하나는 신입생들이 학교 잔디밭 정중앙에 설치된 거대한 모닥불 주위를 뛰는 것이다. 몇 바퀴나 뛰냐고? 바로 자신의 학번만큼!
입학년도로 학번이 부여되는 한국의 대학들과 달리, 미국 대학들은 졸업 예상년도로 학번이 부여된다. 2010년 가을에 입학한 나는 4년 후 졸업 예정이므로 Class of 2014, 즉 14학번이 되는 셈이다. 중간에 군복무, 어학연수, 인턴십 등 다양한 이유로 휴학을 하는 것이 흔한 한국과 달리 미국의 대학생들은 비교적 제때 졸업하는 편이라 이런 셈법이 가능한 거겠지만, 한국식 셈법에 익숙한 사람들에겐 조금 헷갈리기도 한다. (실제로 나는 1년 일찍, 혜령이는 1년 늦게 졸업해서 조금 이상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아무튼 한국식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어려보이는 효과가 있으므로 개이득이다!
이야기가 조금 새버리고 말았지만, 다시 모닥불 돌기 전통으로 돌아가보자면 84학번은 84바퀴, 94학번은 94바퀴를 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우리는 14학번이므로 14바퀴만 돌면 되는데...
14바퀴만 도는 것은 다트머스 기준에서 충분히 하드코어하지 못했는지, 앞에 "1"이 붙어버렸다. (아니면 00학번이 0바퀴만 도는 것이 이상해서 100바퀴를 돌기로 결정된 이후로 이어진 몹쓸 전통일지도 모르겠다) 14바퀴야 그럭저럭 돈다고 쳐도 114바퀴라니...! 아무리 야산(?)에서 n박 오리엔테이션을 하는 하드코어 대학교라지만 정말 극단적이다.
114바퀴를 어떻게 돌아야 할지 머리가 아픈 와중에, 홈커밍 몇주 전부터 학교 잔디밭 정중앙에는 거대 모닥불이 착실히 건설(?) 되고 있었다. 무려 사다리차까지 동원되는 대공사였다. 모닥불에 장작이 쌓여갈수록 114바퀴는 대체 어떻게 돌아야할지에 대한 신입생들의 근심도 쌓여만 갔다.
거대 모닥불이 거의 완성되면 각 기숙사별로 모닥불 하단에 장식될 데코 판넬에 사인을 남긴다. 학기 중이므로 바빠서 직접 사인하러 못 오는 친구들을 위해 대신 사인을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물론 모닥불 맨 뒤에는 자랑스러운(!) 우리의 학번이 적혀있다.
모닥불이 완성되면 114바퀴를 뛰어야하는 신입생들의 기대와 걱정을 안고 홈커밍 축제의 막이 오른다. "진짜 114바퀴 다 뛸거야?", "아니 나는 그냥 14바퀴만 뛸래," "일단 되는만큼 뛰어보고 힘들면 포기하려고," "우리 손잡고 같이 뛸래?" 등의 대화가 기숙사를 채웠고, 나는 당연히 14바퀴만 돌고 나올 생각이었지만, 학교를 뒤덮은 축제 분위기에 괜히 '더 뛰어봐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숙사 조교 (UGA)는 (1) 뛰다가 넘어지지 않도록 운동화를 신을 것, (2) 꼭 다 안뛰어도 괜찮으니 괜한 압박감에 무리하지 말 것 등에 대해 안전교육을 하기도 했다.
모닥불까지는 기숙사별로 한데 모여서 조교의 인솔하에 출발하는데, 다들 약속이나 한듯 학번이 적혀있는 셔츠를 입었다. 페이스페인팅이나 판박이 스티커로 모교 사랑을 과시하는(?) 친구들도 있다. 신입생들이 주인공인 전통이지만 선배들은 물론이고 홈커밍을 맞이해 학교로 돌아온 동문들까지 모두 나와서 지켜보기 때문에 마치 학교 전체가 초록 파도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침내 우리 기숙사가 출발할 차례가 되었고, 우리는 힘차게 교가를 부르며 대열에 합류해 모닥불로 향했다. 수천명이 교가를 부르는 한가운데 선배들의 응원을 받으며 서있으니 없던 애교심도 샘솟는 느낌이 들었다. 힘찬 카운트다운 끝에 장작에 불이 붙었고, 우리 신입생들은 스파르타쿠스라도 된 양 함성을 지르며 모닥불 주위를 돌았다. 우리를 둘러싼 선배들과 동문들도 함성으로 우리를 응원해주었다. 모닥불 주변에는 14학번만 뛸 수 있도록 차단줄이 쳐져 있었는데, 흥분한 몇몇 선배들은 줄을 뛰어넘어 달리기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다들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통에 나도 덩달아 흥분이 되었다.
분명 14바퀴만 돌고 같이 빠져나오기로 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난리통에 맞잡은 손은 놓쳐버렸고, 친구들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원래 돌려고 생각했던 14바퀴는 훌쩍 넘겼고, 나는 어느새 자의로 돈다기보다는 주변에 떠밀려 뛰는 신세가 되었다. 24바퀴, 34바퀴, 44바퀴를 넘게 돌았지만 인파에 밀려 빠져나가지 못했고 점점 내가 몇바퀴를 돌았는지도 알 수 없고 힘에 부치는 와중에...
누군가의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다들 흥분한 상태라 내가 넘어진 것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인파에 밟혀서 크게 다칠 위기였는데,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다가와 순식간에 내 주변에 인간 바리케이트를 쳐주었다. "Are you OK?" 함성 소리를 뚫고 들리는 목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풋볼팀인지, 라크로스팀인지, 아이스하키팀일지 운알못인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그들은 내가 괜찮은지 거듭 확인하면서 건장한 어깨를 서로 맞대 내 주변을 둘러싸 인파를 막아주었고, 나는 덕분에 무사히 일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천천히 몇바퀴를 더 돌고는 "땡큐!"를 외치며 안전하게 트랙(?)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비록 내가 정확히 몇 바퀴를 돌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 없었고, 인파에 떠밀려 넘어져 크게 다칠 뻔하기도 했지만, 다소 백병전(?)스러운 하드코어 전통 덕분에 나 역시 나름의 동기애와 애교심을 느꼈다. 수천명이 함께 부르던 교가 소리가 울려퍼지던 Big Green과, 그 한가운데서 활활 타오르던 모닥불의 열기, 그리고 위기의 순간 흑기사처럼 나타나 나를 구해준 이름모를 운동부 동기들 모두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Written by Elli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