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독일에서 살기 시작해서

20년을 넘긴 타향살이, 이런저런 이야기

by 융이라고 불립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외국살이를 할 줄을, 처음에는 몰랐다. 독일에서 공부하고 독일에서 직장 잡고 살고 싶다고 하는 남편의 바람이 그저 하고 싶은 일들을 읊조리는 청춘의 막연한 소망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국에서 산다는 것이 정든 것들과 익숙한 것들과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과의 철저한 이별과 단절이라는 것도 몰랐다. 말하자면 나의 독일 생활은 무지에서 시작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혼을 하고 3일 만에 떠난 독일은 한국에 있는 나의 사랑하는 것들과의 만남을 열 손가락으로 꼽아지지 않을 만큼만 허락되었다.

전 세계가 하루권인 글로벌 시대에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지만, 시간이 돈이 상황이 여의치 못했다는 이유다.

그러다 오랜만에 방문한 한국은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뭉클해진다. 감정이 메말라버린(메말라야 살 수 있(?)) 외국살이에서 유일하게 감정적으로 무너져도 좋을 편안함이 인천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찾아온다.

"엄마, 이거 한국 냄새나요"

한국에서 받고도 몇 번을 빨았던 옷을 들고 아들은 여지없이 이렇게 말하곤 한다.

한국에서 받은 소포를 뜯으면 또 말한다. 한국에 가면 나는 냄새가 난단다.

맞다, 한국공항에 내리면 무슨 냄새가 난다. 나는 그게 마늘냄새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마늘냄새도 아니다.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특징지을 수 없는 그저 냄새가 나는데, 아들은 그걸 한국 냄새라고 명명한다.

무슨 냄새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그 냄새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코에 훅하고 들어오는 강한 냄새는 아니다. 잔향같이 미지근하지만, 그렇게 심신에도 잔잔하게 스며든다.


생각해보니 복선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1년에 한 번씩 전학을 다녔다. 그러니까 6학년까지 다닌 학교가 총 6군데이다. 매년마다 지방으로 이사를 했다. 회사에서 지방에 사무실이 생기면 아빠가 지점장으로 가야 하는, 뭐 그런 이유에서였다. 경주, 대구, 수원, 부산... 중간에 서울로 2번 다시 전학 간 적이 있으니 6년 동안 매년 전학을 간 것이 맞다. 서울이 고향이지만, 서울에서 산 건 어릴 적 7,8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별명은 늘 서울댁이었지만 말이다.

처음 경주로 전학을 갔던 때 생각이 난다. 처음으로 사투리라는 것을 들었다. 물론 TV에서 배우들이 사투리를 쓰는 연기를 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이었고, 처음으로 듣는 현지 사투리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중에 기억이 나는 게, 처음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갔을 때였다. 친구가 뭔가 하려고 할 때마다 어머니가 자꾸 "그건 파이다. 그건 파이다." 하시길래 집에 초코파이가 많은가? 혼자 속으로 짐작을 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주에서는 안 좋다는 말을 '파이다'라고 했다.

독일에 와서 독일어를 배우고, 어느 정도 알아듣겠다 싶었을 때 바이에른으로 이사를 했다. 여기로 이사 와서, 나는 독일어에 대해 또 한 번의 좌절을 했다. 이웃 할머니의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거다. 그래도 독일에서 산 짬밥이 몇 년인데, 이렇게 안 들리다니... 이전에 살던 베를린에서 너무 한국 사람들하고만 지내서 그런 건가. 나는 역시 외국어에는 소질이 없어서 이렇게 금방 잊어버리는 건가 등등 생각이 많았는데,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여긴 바이에른 사투리가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심한 사투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 방언이랑 견준다고 하니, 외국인인 내가 알아들을 수 있을 리는 없는터. 얼마 지나지 않아 빵집에 갔을 때 젊은 여자애의 말이 잘 들려서 얼마나 안심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아직 일하는 인부들(공사하는 분들이나 수리를 위해 오시는 분들)이나 나이가 많으신 어른들끼리 '서로' 하는 대화는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학원을 다닐 때 중급인 우리 반에 독일 여자애 한 명이 한 달 정도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모두 외국인인 우리들이 어디서 왔고 이름은 뭐고 하며 소개를 하는데, 그 여자애가 자기는 독일인이고 바이에른에서 왔다고 소개를 했다. 바이에른 말만 쓰고 자라서 표준어를 조금 듣고 공부하려고 한 달만 수업을 들을 거라고 했다. 다들 독일 사람이 왜? 하고 의아해하는데 어학 선생님만 고개를 끄덕이던 장면이 기억이 난다.

얼마 전 독일 중부에서 온 회사의 매니저가, 우리가 일하는 주방의 오븐 사용법을 설명해주러 온 사람이 설명하는 것을 같이 듣다가 그 사람이 뭔가를 찾는데 내가 주는 것을 보고는 그 사람이 간 다음에 "융, 너 그 사람 말을 알아들었어? 나는 거의 못 알아듣겠어"하고 말했다. 독일 사람인 매니저가 못 알아들을 정도로 바이에른의 사투리는 심하다. 특히 단어가 다르고 같은 단어의 발음이 다르기도 하다. 나는 그래도 여기서 산 세월이 있어서 그런가, 내가 바이리쉬를 얼추 알아는 듣는다는 걸 그때 알았다.


"어머, 너무 좋겠어요! "

한국에 가끔 방문할 때 나는 굳이 내가 외국에서, 독일에서 산다고 밝히지 않는다. 그런데 어쩔 수 없이 말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제가 해외에서 살아서요. 한다. 그러면 또 묻는다, 어머, 해외 어디 사세요? 네, 유럽이요.라고 하면 대부분 아, 네... 하지만 또 묻는 사람이 있다. 유럽 어디요? 아, 네 독일이요. 하면 꼭 연달아 듣는 말,

"어머 너무 좋겠어요."

뭐가 좋겠다는 건지 물어보진 못 했다. 아마도 내가 제주도에 사는 사람들이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그런 마음과 비슷한 마음 아닐까? 나는 자주, 제주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딱히 섬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다를 좋아하고, 자연을 좋아하지만 도시적인 편안함이 시골적인 것보다 좋고 그래도 번잡한 것보다 좀 한적한 곳이 좋고 그런 내 취향들을 따지다 보니 제주도가 좋았다. 그래서 제주도에 산다는 사람을 보면 부러운 마음이 막 드는, 그런 비슷한 마음이지 않을까?


한국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유치한 싸움

"그래서 잘했다는 거야?"

"아니, 잘했다는 게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야, 그게 말이 되냐? 맨날 얘기해야 돼?"

20년을 같이 살다 보면 싸울 일이 별로 없어진다. 서로를 잘 아니까, 부딪힐 일을 잘 만들지도 않고 웬만한 건 적응이 되어 넘어간다.

우리 집에서 큰 소리가 나는 건 거의 한 가지 이유에서다. 그것도 너무나 유치한 이유...

주로 아침에 일어나서 재활용 쓰레기봉투 안에 밤새 남편이 먹어치운 과자봉지 뭉텅이를 발견했을 때 일어난다.

내가 남편에게 과자를 못 먹게 하느냐. 또 그건 아니다. 할당량(?)을 넘어서 먹는 게 늘 문제인 거다.

가령, 우리 집에 남편과 아들 둘이 있으니 선반에 3개의 똑같은 과자를 놓아둔다면 누가 봐도 셋이서 하나씩이란 말 아닐까? 아들들도 그 정도는 아는데... 그런데 아빠가 두 개 반을 먹어버린다.

낮에는 몸 관리를 해야 한다며 가끔 탄수화물을 끊기도 하고 단백질 위주로 먹는다고 내가 하는 끼니에 불만을 표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꼭 밤에만 그런다. 지킬박사와 하이드 야, 뭐야.

큰 아들이 12살쯤이었던가? 아들이 잔다고 들어갔다가 손에 쪽지 하나를 들고 다시 나왔다. 그러더니 선반의 과자에 붙였다. 쪽지에는 '아빠, ㅇㅇ거예요'라고 쓰여있었다. 아빠가 자기 과자를 먹을까 봐 걱정이 돼서 잠을 못 자고 쪽지를 써서 붙이는 정도라니...

과자 몇 봉지가 뭐 대수냐고 하겠지만, 여기는 독일이고 그 과자는 한국 과자라는 것,

없다고 나가서 살 수 도 없는 곳이라는 점이 문제다. 물론 프랑크푸르트처럼 한국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는 아파트 단지에 한인상회가 있어서 슈퍼 가듯 그냥 나와서 사면되는 곳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앞서 말한 과자들은 다 한국에서 소포로 공수받은 것이고 남편도 당연히 알고 있다.

물론 독일 과자들이 있을 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래서 독일과자들은 마지막 꺼 먹으면 바로 사 오기!로 규칙을 정했다. 슈퍼가 가까우니 이건 자기가 하는 편이다.

과자를 보내준 한국에 있는 친구와 통화할 때 하소연하며 과자를 잘 감춰둬야겠다고 하면, 친구는 야, 치사하게 뭐 과자로 그러냐. 하면서 남편을 두둔했다. 그랬던 친구가 '한 달 살기'로 이곳에 왔다 갔는데 남편이 밤 먹깨비가 되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는, 그다음부터는 야야, 잘 감춰!라고 했다. 직접 보면 이해가 된다.

낼모레가 50인데 우리 부부는 아직도 과자로 싸운다.

한국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유치한 싸움을...


내일이라도 다시 갈 것처럼

누구나 나를 보면 나는 재외국민이고, 교포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독일 교포라는 말이 아직도 낯설고 맘껏 동의되지 않는다.

영주권을 갖고 있지만, 시민권은 신청하지 않았다. 20년 넘게 산 내가 시민권을 얻는 일은 쉽지만, 앞으로도 그럴 마음이 없다. 나는 늘 한국 사람이고 싶다.

한국에서 산 날이 28년, 독일에서 이제 21년째 살고 있으니 언젠가는 독일에서 산 세월이 한국에서의 그것을 넘어서는 날이 오겠지만, 심적으로는 나는 늘 잠시 여기서 사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늘도 살고 있다.

그래야 내일도 살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