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도킨스와 예수천국불신지옥
인간은 원래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 따르면, 생물은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 행동하며, 인간도 마찬가지다. 개인이 남을 돕는 행동조차도 결국 개인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도킨스의 "인간의 유전자는 이기적이다"라는 말은 쉽게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라는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이기적'이라는 말은 그냥 생물학적인 특징으로 이해되지만, '죄인'이라는 말은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판단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완전히 악하다고는 보지 않았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선함을 잃어버렸으며, 신의 은총 없이는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물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도 '이기적'은 선악의 개념과 무관하다. 생명체의 자연스러운 특성을 나타낼 뿐, 유전자가 '이기적'이라고 해서 인간이 도덕적으로 나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독교는 인간 본성에 대해 성선설과 성악설로 나뉘는 이분법적인 관점이 아닌, 다른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인간에게 여전히 선한 잠재력이 있다고 보지만, 타락으로 인해 인간이 죄를 짓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사실 도킨스의 이론이나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인간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한다는 점에서는 맥락은 같다. '이기적'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도덕적 중립성을 가지지만, '죄인'은 도덕적, 종교적 관점에서 인간 본성을 설명하고 판단을 포함한다는 차이가 있을 뿐, 기독교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나 인간이 본능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기적 유전자 이론과 기독교는 둘 다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지적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에서 '이기적'은 도덕적 판단이 아닌 생물학적 사실로, 기독교는 '구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아마도 사람들의 '죄인'에 대한 거부감은, 그것이 '구원'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변화되어야 하는 대상으로의 낙인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일까.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물에 빠진 상태'이고, 예수는 '구명조끼'와 같다. 전도하는 사람들은 남을 억지로 물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빠진 사람에게 구명조끼를 던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이제 막 구명조끼를 입은 그 사람이 물에 빠진 상태의 사람에게 우월감을 느낄리 만무하다. 먼저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우쭐 될 이유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의 전도방식을 부담스럽게 느낀다. 기독교가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신이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거나, 지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진다할지라도,
전도하는 사람들이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선한 바보'일 뿐이다.
그런데 만약 지옥이 진짜 존재한다면, 가장 악한 기독교인이 있다면 ‘지옥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아무에게도 구원을 말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전도를 하지 않을 때, 배가 가라앉고 있는데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방관자가 된 마음으로 불편하다.
기독교의 구원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만 향하고 있지 않다. 믿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구명조끼를 벗지 마세요." 인간은 오늘도 끊임 없이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구원은 단숨에 이뤄지는게 아니다. 죽는 그 날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한다.
영화 <밀양>에서 살인자가 "나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라고 말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이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용서 교리'에 대한 반감을 줬다. 하지만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누구든 쉽게 용서받을 수 있다’에 있지 않다. 기독교에서는 '진정한 회개'를 강조한다. 회개에는 반드시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영화 속 살인자는 피해자의 아픔을 이해하지도 않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다.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는 진정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신이라면 모두를 구원할 텐데"라고 말한다. 그 생각 속에서도 예외가 있다. 독재정치를 했던 사람, 연쇄살인범, 혹은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 등등은 지옥에 가야 할 것 같다. 지옥에 갔으면 하는 사람, 지옥에 가야 마땅한 사람이 예외가 될 수 있다. 그렇게 예외범위가 넓어지다 보면, 결국 우리 모두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에게 '지옥에 갔으면 하는 사람', '지옥에 가야 마땅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죄(또는 이기심)의 크고 작음을 따진다. 하지만 자신이 저지른 죄만큼은 관대하다. 그것이 인간이 가진 고유한 이기심, 죄성이다. 신의 관점에서 보면 큰 개미나 작은 개미나 결국 다 개미인 것처럼 죄의 크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단편적으로 한 사건만 보고 판단하지만, 사실 서로에게 조금씩 상처를 주며 살아간다. 영화 <조커>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악인이 된 서사에 연민감을 느끼듯이, 성경에서나 기도할 때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감정을 신에게 호소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인간이 완전히 선할 수 없는 존재라고 본다. 하지만 신은 그런 인간을 이해하며,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기독교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신의 은총을 통해 선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신을 몰랐지만 선한 행동을 한 위인이, 단지 신을 몰랐다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우리는 누구의 구원 여부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성경에 따르면, 신은 자연과 양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바울은 "의인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게 선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의 확언이었다.
의인 이야기 하니까 또 인의를 외치던 공자가 생각나는데, 공자는 '인'과 '의'를 중요하게 여기며 도덕적인 삶을 강조했다. 공자는 예수를 알지 못했지만, 그의 가르침은 인간의 선함과 윤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만약 공자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은 예수의 구원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대 사회는 '참교육'과 '사이다'를 원한다. 우리는 작은 실수 하나로도 사람을 단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사과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세상, 한 번 비난받으면 회복하기 어려운 세상. 어쩌면 이것이 진짜 지옥일지도 모른다. 기독교는 이런 세상에서 '바보가 되라'고 말하는 종교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회개는 정말 어렵다. 그리스도인 중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있을까. 놀랍게도 한국에서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다. 손양원 목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 두 아들은 살해당한다. 손양원 목사는 통곡한다. 두 아들을 잃은 슬픔 때문이 아니라,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구원 받지 못 한 것을 슬퍼 통곡하였다. 그 후 손양원 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았다. 사람을 끝까지 믿는 믿음, 아이처럼 순수한 믿음. 신을 믿든 안 믿든 우리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 세상을 꿈꾼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결코 가볍지도 실천하기 쉽지도 않다. 그것은 인간을 끝까지 믿었다가 인간에게 배신당하고 죽임당한 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