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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비나 Jun 21. 2023

킬러 문항이 정말 킬링하는 것은

 수능에서 '킬러문제', '킬러문항'을 뺀다는 이주호 교육부 장관의 의견 표명이 전국의 수험생과 학부모, 그리고 교육 현장의 교사들까지 들썩이게 만들었다.


 중학교에서만 10년을 보냈지만,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입학시키는 비평준화 지역에서 중3 담임을 몇 년 하다보니 고등학교를 보낼 때마저도 아이들의 최종 목표인 대학을 잘 보내는 고등학교를 보내기 위해 아이들을 진학 지도 해왔다.


 참고로 중학교 시험은 과목별로 90점이 넘으면 모두 A 성취도를 받을 수 있다. 80점~90점 미만은 B 성취도를 받는다. 이런 평가 제도를 절대평가라고 한다. 다른 말로 '성취평가제'이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가면 100명의 학생들이 경쟁을 했을 때, 1등부터 100명을 줄을 세운다. 아니 세워야 한다. 왜냐하면 상대평가이기 때문이다. 1에서 9등급으로 아이들을 줄을 세워 상위 4%까지는 '너넨 1등급!' 그 밑에서부터 7%까지는 '너넨 2등급!', 아무리 잘 해도 누군가는 9등급을 받아야 하는 시스템이다. 2008년 노무현 전 대통령 때부터 등급제를 시작했다.(그 등급제의 첫 시작을 경험한 수험생이 바로 나와 나의 친구들이기에 그 혼돈의 시기를 기억한다.) 100명이 시험을 봤을 때, 1등에서 4등이 몇 문제 차이로 실력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불공정하다고 생각해서 기인한 등급제이다. 그러니 1등에서 4등까지는 '너네 다 같이 1등해!' 라는 생각에서 생긴 것이다. 그런데 학생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2등급의 머리에 있는 것이다. 자신의 코 앞에서 닫힌 1등급의 문. 그보다 억울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교사들은 더욱 더 1등과 100등을 확실히 줄 세우고 싶어진 것이다. 그럼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킬러 문항"이다.

확실한 1등을 만들어 줄 "킬러 문항".

수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각 학교의 수준에 따라 각 과목 교사는 확실한 줄을 세우기 위해 킬러 문항을 만든다.

"어떻게 해서든 1명만 맞고 다 틀려라."

"응시생들의 점수를 kill 하라." 라는 마음으로 만드는 문제들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에 나는 놈, 그 위에 나는 놈'을 이기기 위해 아이들은 자신의 사력을 다해 공부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줄 세우는 데만 급급하여 정작 100등의 배움은 누구도 관심갖지 못한다. 60등의 성장엔 관심이 없다. 다 같이 같은 것을 배우지만 누군가는 제일 점수가 낮아야만 하는 것이고, 고등학교 영어 시험의 평균 점수가 40점, 50점대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제도에서 교육은 사라졌고, 학습은 사라졌다. 30명이 함께하는 학급에서 나 빼고 29명이 경쟁자인 3년의 고등 시절을 상상해보아라.


이 시스템 속 킬러 문항이 킬링하는 것은 학생들의 점수가 아니고, 바로 우리 아이들 그 자체다. '아이들의 시간',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희망', '아이들의 친구', '아이들의 배움'을 킬링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의 현재 고등학교 시절은 이렇지 않을까?

 고등학교 입학하는 순간, AI가 점유한 이 세상에서 자기를 탐구할 시간도 없이 유망한 직업을 정하고 진로를 정해 생활기록부를 완성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숨 돌릴 때쯤 각 교과마다 해야 하는 수행평가. 그것마저도 '쟤'보다 더 잘 해야 한다. '쟤'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낸다. 어디에도 '나만의 것'이 없다. '쟤'보다 더 잘해야 한다. 매일 남과 비교하는 생활 속에서 3년을 보낸다. '내'가 뭔가를 재밌어 하고 잘 한다고 해도 '쟤'보다 못 하면 의미가 없다. 친구는 같이 급식 먹으러 갈 정도면 되고, 저 친구보단 내가 잘 해야 대학 간다는 마음으로 괴롭다. 100점을 받았는데 '쟤'도 100점이면 같이 2등급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킬러 문제가 없어서 킬링 당했다.


 이렇게 줄 세우기식이, "공정함"이 우선되는 교육 현장에서 우리가 이제 성찰해야 하는 것은 사교육이 없어져야 하는 것이고 말고를 떠나, 킬러 문항을 없애느냐 마느냐를 떠나, 수시냐 정시냐를 떠나 아이들이 어떻게 급변하는 미래에 적응하여 사회의 일원으로 "행복"할 수 있는지 바로 그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STOP을 외쳐야 멈추고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언젠가부턴가 시스템 속 부속품으로서 작용하는 '교사'라는 직업을 가진 나는 무력감에 빠진다.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교사의 마음보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잘 줄 세울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하는 교사들은 언제 STOP을 외치고 어디서부터 고쳐야할지조차 모르겠다.   

 그저 오늘도 아이들이 다치지 않고 학교에 잘 와주길, 이탈하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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