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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사비나 Jul 13. 2024

우리 아이는 ADHD지만, ADHD는 아니에요

ADHD를 ADHD라고 바라보는 시선은 무례하다.

"선생님, 아이 없으시죠?"

다소 흰 티에 청바지를 입은 내가 젊어 보였을까, 학부모님이 나를 젊은, 저경력 교사로 생각했는지 대뜸 물었다.


"왜요, 어머님?"

"아이가 없으실 것 같아서요. 선생님이 전화하실 때마다 가슴이 떨려요. 아이가 있는 선생님들은 좀 더 잘 이해해 주셨거든요..."

일단, 나를 젊게 봐주신 것에 대해 감사해야 하나? 잠시동안 생각했다. 그러나 곧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저 일반화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젊은 교사는 아이가 없어서 학생들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 아이가 있는 교사는 아이를 더 잘 이해할 것이라는 판단.

우리는 아이가 있는 어른이 좀 더 이해의 폭이 넓고, 아이가 없으면 견문이 좁을 것이라고 성급하게 생각한다. 이는 각각의 존재를 개별적으로 보지 않는 데에서 오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아이가 없는 교사들도 학생의 행동을 넓은 시야로 이해해주기도 하고, 아이가 있는 교사들보다도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사랑으로 가르치는 교사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일반화의 오류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선생님, 유현이는 협력 활동 할 때,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네요."

"유현이? 유현이 외동이잖아~"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모든 외동을 하나로 묶어, 외동은 곧 이기적이라는, 각 존재의 '개별성'을 무시한 발언을 많이 하곤 했었다. 그렇다면 3남매는 모두 이타적일까?


 ADHD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선생님이 ADHD 아이를 낙인찍을까 염려하며 아이의 진단명을 꽁꽁 숨기고 싶어한다. 나 역시 세모의 초등학교 1학년 때 낙인이 두려워 말하지 못해다. (그리고 여전히 낙인은 두렵다.)


나는 ADHD 아이가 ADHD로 보이는 게 왜 두려울까?

”ADHD는 폭력적이지 않아?

ADHD는 수업 방해하고 시끄럽지 않아?

ADHD는 부모가 그렇게 키워서 그런 거 아냐?

ADHD가 어떻게 조용해?

ADHD가 어떻게 공부를 잘해?

ADHD라서 계속 친구들이랑 싸우는 거 아니야?“


정신과 의사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라는 책에 '노인을 바라보는 양극단의 시선'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양극단의 한 축은 노인에 대한 폄하, 노인을 현실 감각을 잃어버린 분별력 없는 사람으로 보는 시선, 다른 한 축은 노인에 대한 영혼 없는 습관적 존중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정혜신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아이가 다르듯 모든 노인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은 노인을 노인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노인이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노인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여기서 노인을 ADHD로 바꿔보자.

“모든 아이가 다르듯 모든 ADHD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ADHD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ADHD를 ADHD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그저 미디어에 노출된 '통제불능' 아이들로.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ADHD' 자체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아이들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세모는 'ADHD' 자체가 아니다. 세모는 내가 열 달을 품고 낳아 그 아이의 건강함과 눈 맞춤, 웃음에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던 나의 소중한 핏줄이다. 세모는 초콜릿 케이크를 입에 가득 넣고 행복을 느끼는 생생하게 기쁨을 느끼는 고유의 존재다. 세모는 친구에게 장난을 치고, 나에게 거짓말을 밥 먹듯 해 혼이 나면서도 자기 전에 '사랑해'를 말해주는 귀여운 존재다. 세모는 시끄럽고 산만하지만 폭력적이지 않은 성향의 아이다. 조용하지 않지만 수학을 좋아하고, 길고양이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해 우유를 먹여주는... 또 다른 존재를 존중할 줄 아는 존재다. ADHD 그 이상.


ADHD라는 네 글자에
아이들의 고유성을 무시한 채,
낙인을 찍지 않기를,
적어도 아이들 하나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기 위해서는
부모부터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
ADHD라서 못할 거야.
ADHD라서 사회생활이 힘들 거야.
미리 단정 짓지 않는다.
그러한 시선은
ADHD 아이들의
고유한 개별성에 대한 무례다.


P.S. 정혜신 작가님의 글귀에서 노인을 '교사'로 바꿔보았다.

"모든 아이가 다르듯 모든 교사도 당연히 다 다르다. 개별적 존재들이다. 그런데 학부모들은 교사를 교사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전부인 존재로 바라본다. 교사가 아닌 어느 누구에게라도 그런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폭력이다. 누군가와 생생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기체가 아닌 '교사 일반'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존재에 대한 무례다. 그 시선은 그의 개별성을 몽땅 휘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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