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늘 Sep 18. 2022

일을 잘 한다는 것.

대기업 주니어 PM이 3년 연속 인사고과 S등급을 받고 느낀 점

내 생각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일을 꽤 잘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옆자리의 동료보다는 내가 낫다, 정도로는 생각하는 것 같다. (실제로 인간은 객관적 지표와는 무관하게 '일단 내가 평균치보다 낫다'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매년 인사 평가 시즌마다 상위 고과를 받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장인이 불만을 갖는 것이다.


사실 인사 고과에는 개인의 역량이나 성과 외적으로도 굉장히 많은 요소가 개입한다. 고과 등급별 배분 기준도 회사마다 다르며, 평가 기준에 대한 조직 DNA나 문화는 물론이고 회사 내외부적 상황도 중요하다. 부서에서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영향력 그리고 나를 평가하는 상사와의 관계도 물론 영향을 미친다.

특히 상대적으로 관료주의적이고 평가/보상 관련 HR 제도가 경직된 대기업의 경우 더욱 그렇다. 최근에는 절대 평가를 도입하거나 무등급 상시 평가 제도를 도입하는 곳도 있지만, 아직까지 많은 대기업들이 인사 평가에 상대 평가를 적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 회사의 평가 구조상 최상위 고과는 전체 인원 중 오직 3%만 받을 수 있고 대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는 C를 받게 된다. 한 팀이 20명일 때 이론적으로 단 1명만 최상위 고과를 받을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상위 고과는 그 해의 승진 대상자에게 돌아가기 마련인 것이다.


나 역시 대기업에 입사한 후 선배들로부터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 열심히 해도, 잘 해도 어차피 C를 받으니 적당히 잘 하면 된다고. 아마 온갖 일에 열의를 보이던 막내에게 부담을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는 애정 어린 조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입사 첫 해에 최상위 고과를 받았고, 그 다음 해에도, 그리고 올해까지 3년 연속 최상위 고과를 받았다. 내가 잘 해서 받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1)좋은 성과를 내기 위해 성실하게 일했고, 거기에 (2)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임을 인정한다. 이 중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요소인 첫 번째 영역, 즉 내가 어떤 생각과 애티튜드로 업무를 해왔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애자일 조직은 이렇게 일합니다


'애자일 조직은 이렇게 일합니다(스티브 매코널, 2022)'라는 책에 따르면 애자일 제품팀이 가진 목표의 명확성과 자율성의 관계에 따라 성과는 4가지로 분류된다. 물론 이중 가장 바람직한 성과는, 목표가 명확하고 자율성이 있는 1사분면의 '성구적 성과'다.


자율성과 목표의 명확성 간의 관계

이 다이어그램을 애자일 조직의 이해 뿐 아니라, 개인의 성과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해 볼 수 있다. 목표는 명확하지만 실무자에게 자율성이 없다면 당연히 성과는 나지만 딱 예상한 대로의 성과('강제적 성과')가 날 것이다. 자율성은 있지만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면 무언가 열심히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비즈니스적으로 우수한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조각난 성과').


물론 자율성과 목표의 명확성이라는 이 2개 요소 중 '자율성'이라는 요소는 실무자 자신의 결정력보다는 조직이 실무자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훨씬 강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우리 조직이 '그런 곳'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기 위해 실무자가 시그널을 적극적으로 탐색할 수는 있다. 실무자 자신이 선구적 성과를 내고 싶다면 내가 몸 담은 회사, 그리고 함께 일하는 리더가 자신의 자율성을 보장해줄 수 있는지를 우선 판단해야 한다. 개인으로서 능력치가 높다고 해도 윗선에서 지시한 대로만 일해야 하는 곳이라면, 항상 윗선에서 생각한 대로의 결과만이 나오게 된다. 회사의 입장에서도 실무자에게 목표 설정과 그 과정에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하다. 개인 역량과 상황 판단이 우수한 실무자라면, 회사가 실무자에게 자율성을 전혀 보장하지 않을 때 기꺼이 이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표의 명확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층위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1)조직의 목표(2)실무자의 목표다. 우선 조직의 비전과 목표가 명확해야 한다는 점은 실무자가 성과를 내기 위한 기본 전제다. 실무자가 아무리 개별 프로젝트에서 성과를 낸다고 해도, 전체적인 비전이나 전략이 없다면 그 성과는 결국 회사 차원에서 '조각난 성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역시 실무자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다. 실제로 그 회사에 들어가서 일해보기 전까지는 우리 조직의 비전이 명확한지, 리더십은 어떠한지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실무자가 고성과자로 인정받기 위한 여러 요소 중 실무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바로 '(2)실무자 목표의 명확성'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업무를 맡더라도 이번 프로젝트의 목표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전략적으로 실행하는 사람과, 앞단의 고민 없이 기계적으로 혹은 전술적으로 '일을 쳐내는' 실무자는 실행부터 결과까지 다를 수밖에 없다.


실무자로서 내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회사와 조직의 비전을 상기하며 내 프로젝트의 북극성 지표(North Star Metric)와 방향성을 얼라인하는 것이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의 단기 성과만 바라보는 근시안적인 시야에서 벗어나 마치 내가 사장 혹은 임원이 된 것처럼 비전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신규 프로덕트의 차별화된 Key Value를 발견하기 위해 Lean Canvas나 경쟁사와의 Positioning map을 그려보기도 하고, 아무도 지시하지 않은 고객 설문조사를 설계해서 VoC를 수집한다. 나의 논리와 전략에 스스로 동의할 수 없다면 고객에게도 서비스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 마구잡이 서비스에 어떤 고객이 감동을 느끼겠는가?


이 과정에서 물론 새로운 액션 아이템이 수도 없이 도출되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할 일을 만드는 편이다. '이번 스프린트에서는 이게 아쉬웠으니까, 다음 번에는 이 점을 보완해서 다시 테스트 해보고 싶습니다.' 라고 신규 task를 생성하는 경우도 많다. 내가 알아서 일하는 만큼 내 업무에 대해서 상사의 신뢰를 받을 수 있었고, 더 많은 자율성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일은 그 누구도 나에게 지시한 적 없고, 따라서 마감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업무다. 그러나 실행과 산출물에 대한 마감일은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회사에서는 '시키지도 않은 일'로 업무 데드라인을 미룰 수 없다. 마감일은 지키면서 내가 욕심 낸 범위까지 알아서 소화해야 한다. 내가 더 밀도 있게 집중하고, 더 빠르게 실행하고, 더 오래도록 남아 일하는 이유다.

시킨 적 없지만 회사의 방향성과 서비스의 목표를 고민하고, 백업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전략부터 실행의 액션 아이템까지 논리를 세워 보고하는 사원을 나쁘게 평가하는 상사는 아마 없을 것이다. 이 과정을 거친 프로덕트 매니저라면 (비록 팀에서 막내라고 해도) 회사의 임원이나 사장에게도 자신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내가 담당하는 프로덕트에 대해서는 회사의 그 누구보다 깊게 고민했기 때문이다.




물론, 실무자가 목표를 명확하게 세우고 이를 자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리더십과 조직문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 회사가, 나의 리더는 어떠한가?'라는 실무자의 판단이 중요하다. 열심히 해보고 싶은 내 마음과는 달리 성과를 내기 어려운(자율적으로 일하기 어려운) 환경이라면 그 때는 더 나은 환경을 적극적으로 탐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운 좋게 그러한 환경이나 리더를 만났다면, 부끄럽다 생각하지 말고 감사함을 자주 표현하자. 나를 믿어주고 지지해주는 상사는 정말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인생의 귀인이다. 또한 신뢰를 기반으로 다져진 상사와의 관계는 실무자가 보다 업무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선순환을 가져온다.


첫 직장으로 선택한 이곳에서 나의 리더는 내 가치와 열정을 높게 평가해 주었고, 보다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나대지 말고 적당히 순응하며 일하라'고 지시받는 대신 '마음껏 나대면서 하고 싶은대로 다 해봐'라고 응원받은 덕분에, 순수했던 초심의 열정을 잃지 않고 신명나게 일하고 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