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반기는 곳
카파도키아에서의 멋진 일출을 품은 채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이 여행의 시작이었던 몇 년 만에 돌아온 이스탄불은 공항을 내리자마자 여행이라는 냄새로 설레게 했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먼지 쌓였던 배낭을 다시 메고 걸으며 누볐던 터키. 단 10분도 참지 못하고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렸던 한국에서와 다르게 인터넷 없이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많은 걸 느끼고 보여준 나의 터키 여행 시작점으로 다시 돌아왔고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이스탄불을 경험하고 싶었다. 터키 여행 중 가장 큰 궁금증은 터키와 그리스와의 이야기였다. 트로이 목마부터 고대 그리스 신들의 산과 많은 그리스 시대의 유적들 그리고 건축물들에 새겨진 그리스의 흔적들 때문이다. 그래서 걸어서 이스탄불의 역사를 느끼는 프라이빗 투어를 하기로 했다.
2주 전까지 바다에서 수영을 했었는데 다시 돌아온 이스탄불은 어느새 두꺼운 외투 없이는 추운 날씨로 변해있었다. 9시부터 시작되는 투어의 인원은 딱 3명이었다. 보다 많은 이야기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에 한국어로 진행되는 투어를 결정했고 터키인 가이드가 한국어로 전해주는 이스탄불의 깊은 이야기들을 들을 생각에 기대됐다. 투어의 시작은 할리 취역에서 이스탄불의 발 랏지 구로 걸어가면서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에 세운 성벽을 따라 걸으면서 가이드는 말했다.
'이 성벽은 로마 제국이 만들었어요. 오스만 제국과의 마지막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은 금각만 건너 탁심에 위치해 있었고 로마 제국의 성벽을 넘기 위해 탁심의 언덕으로 올리브 오일을 뿌려 배가 미끄러지면서 빠르게 성벽으로 갈 수 있도록 했어요.'
오스만 제국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성벽을 담벼락 삼아 여러 상점들과 집들이 줄지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가이드가 해주는 크고 작은 이스탄불의 옛이야기들은 걷는 시간을 즐겁게 해 줬다. 10분 정도 걸었을 때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했다.
카디르 하스 대학. 이 곳은 오스만 제국 시절 담배 공장이었다. 이 담배 공장은 당시 그리스 노동자와 오스만 제국의 노동자들이 함께 일했던 곳이다. 당시 상당히 폐쇄적이었던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특성상 놀라울 일이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던 것.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타 종교와 함께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당시 무슬림 여성들은 집안일 외에 다른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슬람이라는 당시 폐쇄적 색이 짙었던 종교의 벽을 허물었던 최초의 장소였던 것이다.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들과 그리스 여성들이 함께 일하는 모습을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는 무슬림 여성들과 그리스 여성들의 작업 장소가 구분되어 있었지만 함께 일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각한 '터키의 비교적 자유로운 이슬람의 시작이 이 곳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카디르 하스 대학 이전에 담배 공장이었던 이야기가 끝나고 가이드와 함께 다시 걸어서 발 랏지 구 외곽에 도착했다. 발 랏지 구의 첫인상은 이랬다.
'터키의 경리단길, 연남동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 것 같아.'
색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알록달록한 집들은 싱그러웠다. 그리고 발 랏지 구가 정말 멋졌던 것은 오스만 제국이 이스탄불을 지배하던 시기에도 그리스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지냈던 곳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집들은 현관문 양쪽으로 그리스 건축 양식을 본뜬 기둥이 서 있고 어떤 집들은 문틀에 유대인들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실제로 아직도 그리스 학교는 학생들이 드나들고 불가리아 정교도의 교회에는 사람들이 드나들며 기도를 드린다. 약간은 쓴 내 나는 터키 커피의 향기가 물씬 풍기고 골동품들이 인도를 차지하고 있는 발랐은 수백 종류의 사이다를 파는 사이다 가게, 술이 금지되었던 시기부터 영업을 해오고 있다는 작은 펍부터 터키의 최고 인기 드라마 촬영지까지 그야말로 핫한 느낌이었다.
나의 터키 여행 중 커다란 궁금증이었던 것. 터키와 그리스와의 이야기. 터키와 그리스는 옛날부터 이스탄불과 에게해를 두고 잦은 반목이 있었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게 되면서 그 갈등은 극에 달했고 그리스는 최악의 시대를 지내게 되고 지속적인 마찰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아타 튀르크 시대의 전쟁을 거쳐 지금까지 키프로스의 영토 분쟁과 최근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와 시키는 움직임에 크게 반발하고 있다. 가이드를 통해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터키와 그리스와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문장이 생각났고 그 문장은 터키와 그리스와의 관계를 물었던 나에게 안탈리아의 터키 친구가 해줬던 말이다.
'한국이랑 일본이랑 비슷해.'
이슬람만이 아닌 여러 종교와 사람들이 섞여 살아가는 색다른 이스탄불의 모습과 터키와 그리스와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나는 하루 종일 걸어서 다리가 살짝 아팠지만 너무 기분이 상쾌했다. 모두가 가는 곳이 아닌 찾아야 갈 수 있는 곳에 스며들어 하루 종일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던 시간들이 너무 소중했다. 서로 어울리고 때로는 그냥 스쳐 지나가고 사람 사는 냄새나는 발랏에서 또 다른 이스탄불을 만났고 터키에 다시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랐다.
터키에서의 마지막을 보내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한국으로 돌아가 여행 자금을 모으려 애쓸 나 자신이 잘 견디길 바라면서 Ruel의 Painkiller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