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아침, 한겨레의 기사 두 편을 읽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 수는 없는지라 매일 아침 한겨레의 기사를 훑어보곤 합니다. 주로 경제섹션과 국제섹션을 위주로 살펴보고, 토요일 아침엔 문화섹션에서 '책&생각'을 살펴봅니다. 오늘 아침도 종종 빼먹곤 하는 이 습관을 이행했습니다.
첫 번째 기사는 소설가 김규나와 관련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소설가 편혜영에 관한 기사였습니다. 공교롭게도 두 소설가의 소설을 모두 읽지 않았습니다만, 김규나란 소설가는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편혜영은 제법 익숙한 이름이었습니다.
저는 한강의 소설을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몽고반점」을 읽었고, 부커 인터내셔널 프라이즈를 받고 한참 뒤에야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읽었을 뿐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작별하지 않는다』도 읽었던 터라, 김규나의 비판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명 소설가의 광역 어그로'쯤으로 생각하고는, 별 걸 다 기사로 써주는구나라며 심드렁하게 넘겼더랬죠.
무명 소설가들은 정말 많습니다. 매년 신춘문예로 등단하는 작가와 문예지 신인상을 합치면 소설가만 20명에서 50명 정도가 등단을 합니다. 그렇게 등단 이후 단편소설집 한 권을 엮어내지 못하는 소설가들이 절반은 된다고 전해집니다.
'나의 첫 책'이란 기획 기사로, 작가에게 원고를 받아서 게재하는 듯합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는 기획인데요, 아무래도 김규나때문인 듯합니다. 글은 "등단한 해에 회사에 입사했다."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이어집니다.
등단은 했지만 청탁이 오지 않던 때였다.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없다면, 누구도 소설을 원하지 않는다면 더는 작가가 아닌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청탁과 관계없이 계속 소설을 썼다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텐데, 아무래도 쓰지 않게 되었다. 독자를 기약할 수 없는 소설을 홀로 써나갈 만큼 사무원은 호락호락 시간을 내주는 직업이 아니었다.
이후에도 사무원 생활은 계속되고 청탁은 여전히 없었다. 다시 일 년쯤 지나 역시 소설을 못 쓰려나 보다 생각할 즈음 청탁이 왔다.
신문사에서 신춘문예로 등단해도, 이들이 쓴 다른 소설들이 실릴 수 있는 지면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주로 문예지 지면이 아니라면, 원고료를 받고 소설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바늘구멍 같은 등단 시스템을 뚫고 나왔어도, 두 번째 관문인 '문단'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소위 '문단권력'이 지배하는 세계에 편입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준의 아카데미즘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소설가 자신이 '상품성'을 갖춰야만 합니다. 출판'시장'에서 작가 그 자체는 하나의 '브랜드'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저자성이 기업가적 활동이 되었다"는 시몬 머리(Simone Murray)의 지적에도 눈길이 갑니다.
한쪽에는 하나의 브랜드로 홍보되는 스타 작가들이 있지만 ‘중견작가(midlist)’라고 표현되는 대다수의 작가는 출판사의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편집자와 마케터의 관심을 얻으려 서로 경쟁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작가가 이렇게 암울한 경제적 현실에 직면했는데도 저자성에 대한 일반 대중의 관심이 여전하다면 그것은 스타 작가 현상 덕분이다.
대다수 작가의 소득 감소와 직결되는 문제는 출판사들이 기존에 담당했던 지원 역할에서 서서히 물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케팅과 홍보 활동이 작가들에게 아웃소싱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출판사는 작가들에게 소셜 미디어 활동을 활발하게 할 것을 권한다.
- 시몬 머리. 「저자성 」. 『옥스퍼드 출판의 미래』. 교유서가. 2024. 107쪽~108쪽.
같은 책에서 앨리슨 베이버스톡(Alison Baverstock)도 "출판사와 작가 중에 어느 쪽이 브랜드를 대표하는지 조사한 결과, 출판사 이름보다 작가 이름이 훨씬 더 눈에 띄며 작가와 마케팅의 연결성이 계약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라고 말합니다.
그나마 편혜영의 경우는 흔치 않게 성공적인 편입니다. 작품 목록이 쌓이고, 수상 경력이 불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문예창작과 출강으로 이어졌습니다. 보통 '쓸데없이 가방끈이 긴' 사람이 아니라면, 주민센터 글쓰기 강의를 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등단도 쉽지 않고, 그래서 가방 끈이 길어지는데, 등단을 해도 전업작가로 먹고사는 일은 결단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심지어 문학출판시장은 점점 축소하고 있습니다. 스타작가 몇몇이 시장을 과점하고, 중견작가들은 미약하고, 대부분이 가난한 작가들이 아귀다툼을 할 수밖에 없는 시장 구조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명작가의 시샘 섞인 볼멘소리를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1968년생으로 2006년에 부산일보 신춘문예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보통 소설가들은 20대 중반에 등단합니다. 30대 초반에 등단해도 늦었다고 보는데, 불혹에 가까워서 등단을 한다면 일단 '브랜딩'이 어렵습니다. 여기에 고질적인 '학연'과 '패거리 문화'에서도 소외됩니다. 어느 학교에서 누구에게 글쓰기를 배웠는지, 그리하여 어떤 '글쓰기 문화'를 경험했는지, 그 결과 어떤 문예지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을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나이를 먹고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했다는 점부터가 그다지 좋은 출발선이 아니었다는 점만 놓고 생각해 보면 시장에 대한 다소 볼멘소리를 낼 수도 있겠습니다. 김규나는 무명작가여서 원고 청탁이 없었고, 원고 청탁이 없으니 더 쓸 수가 없어 무명작가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주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문학출판시장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피해자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여간 엉뚱한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김규나의 이력을 조금만 살펴봐도, 이건 아니다 싶습니다. 등단 이후에 치열하게 필치를 펼쳐온 것도 아닙니다. 작품목록과 수상경력만 살펴봐도 대략 가늠이 됩니다. 결코 부지런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은 무명소설가였던 겁니다. 나이가 어려서 아직 뜻을 펼쳐볼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기회도 없었다고 한다면 이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낼모레면 이순이 되는 노인입니다.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다시 꼼꼼히 살펴보니, 이건 볼멘소리가 아니었습니다. 10년 전 광화문에서 폭식을 했던 일베와 마찬가지로, 그냥 혐오를 내지른 것이었습니다. 10년 후엔 나도 저런 노인이 될까 싶어, 그저 두렵기만 합니다.
누구나 감상과 비평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감상과 비평이 다른 사람과 같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위대한 소설가 한강'일지는 모르겠지만, 제게는 늘 '참 불편한 소설을 쓰는 고약한 중늙은이'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감상과 비평에는 타당한 증거들이 필요합니다. 이런 이유로 불편하고 저런 이유로 고약하다는 설명이 필요하죠.
"시대의 승자인 건 분명하나 역사에 자랑스럽게 남을 수상은 아니다"는 평가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오로지 그의 판단이니까요. 그저 "올해 수상자와 옌롄커의 문학은 비교할 수조차 없을 만큼 무게와 질감에서, 그리고 품격과 감동에서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부박한 논리로는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드러낼 뿐입니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저는 한강의 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습니다.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해도 한강의 소설에는 '엄청난 무게와 질감'이 내재되어 있으며, "언어미학의 품격과 내용적 감동의 현격함" 또한 갖추고 있음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저 제가 옌롄커의 소설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둘을 비교하기 어렵습니다만, 한강의 소설들을 제대로 읽어보았다면 "현격한 차이"를 느끼긴 객관적으로 어려워 보입니다.
"수상작가가 써 갈긴 '역사적 트라우마 직시'를 담았다는 소설들은 죄다 역사 왜곡"이란 주장에도 합당한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저의 건전한 상식에 부합하는 "광주시민을 우리나라 군대가 잔혹하게 학살"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제주 시민을 우리나라 경찰이 학살"했던 제주4.3.사건에 대한 부당한 조롱과 폄훼만 보일 뿐입니다. "한국의 역사를 뭣도 모른다"는 자백에 불과해 보입니다.
제일 한심스러운 부분은 "출판사 로비"같은 헛소리입니다.
정교하지 못한 검토에 기반한 주장을 우리는 보통 '뇌피셜'이라고 합니다. 한강의 작품들은 주로 호가스출판사를 통해 영문판이 유통되고 있습니다. 호가스는 펭귄랜덤하우스출판사의 임프린트이기도 하고요. 세계 최대의 출판그룹인 펭귄랜덤하우스에는 300여개의 임프린트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옌렌커의 소설, 『Serve the People!』을 출간한 빈티지출판사 역시 펭귄랜덤하우스의 임프린트입니다. 어차피 다 제 식구란 말이죠. 그러니 "출판사 로비에 놀아났다"는 뇌피셜은 본인의 바람을 투영한 극단적인 아집에 불과합니다.
내일모레면 이순이 되는 노인의 필치라고는 믿기 힘든 '혐오 표현'도 남발합니다. 오쉿팔, 음주 운전쟁이 아비, 대똥 같은 것들은 처음 읽을 때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냥 넘겼었는데요, 김규나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난 다음에 읽어보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차라리 한국문학의 번역 지원 사업에 대한 비판이라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한국어를 전세계에서 제1언어로 사용하는 인구가 총 7730만명으로 전 세계 언어 중 14위(1.004%)에 불과합니다. 한국어로 된 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만으로는 언어의 한계가 분명합니다. 소설처럼 번역을 하더라도 문학미를 대체로 유지할 수 있는 장르를 다만 영어로라도 번역해서 소개하는 노력은 상당히 필요합니다. 배알이 꼴려서 남의 수상 소식에 침이나 뱉는 개수작보다는 무언가 보탬이 되는 사고가 절실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