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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자기 Oct 24. 2020

+덧거리) 애 낳는 도구?

2020년 10월 23일 금요일


이번 편은 말랑말랑 감성으로 일기장을 끄적거리던 본캐가 아닌 날카롭게 현상을 관찰하는 기자 감성의 부캐가 쓰는 글입니다. 저번 12번 일기를 마지막으로 끝낼까 아니면 이 일기까지 공개할까 말까 하다가 보너스처럼 공개하기로 선택했어요.



필라델피아 날씨: 완벽한 가을 온도. 살짝 흐림

내 마음의 날씨: 질문의 안개 가득




결혼 1년차 무렵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있었다.


시부모님이 아는 어떤 부부가 있다고 한다. 결혼해서 아이가 7년인가, 8년인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 커플은 이혼했고, 남자는 재혼했다고 한다. 지금 그 남자는 아이 셋을 낳고 잘 먹고 잘 산다고 했다.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아마도 여자 쪽이 문제가 있어서 임신이 어려웠던 거겠지 그 이혼한 부부는.


왜 갑자기 이 이야기가 생각났을까?


시어머니는 그때 나에게 어떤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나는 왜 아이를 낳고 싶은 걸까?


솔직히 답은 단순하다. 그냥 2세를 보고 싶다. 나를 닮은 2세가 보고 싶다.


독일의 철학자는 이런 나를 이기적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태어나는 애는 무슨 죄냐고. 부모가 단순히 2세를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태어나는 그 아이는.


글쎄. 나는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까.




현재 문화면, 사회면 기사들을 살펴보면 '여성은 임신 기계가 아니다'라는 흐름이 한국에 있는 것 같다. 이제는 정치면 기사들까지 보이는거 같기도하고.


'여성은 출산의 도구가 아니다' 말 자체에 100% 동의한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의 '맘충'이라는 단어를 혐오한다.


그렇다. 나는 아이를 낳는 도구가 아니다.


저 말을 조금 비틀어보자. 그럼 이미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여성들은? 그녀들은 이미 도구로 전락했나. 엄마들을 '맘충'이라는 단어까지 만들어 폄하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이 문제는 나중에 한번 제대로 각잡고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놈에 직업병.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써가는 이 일기장에서조차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인터넷 어딘가에서 이런 댓글을 본 거 같다.


비혼/딩크/결혼/출산/육아 선택하는 거 정상.

비혼/딩크/결혼/출산/육아 욕하는 거 비정상.


완전 동의.




다시 본질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나는 왜 아이를 이렇게까지 해서 낳고 싶은 걸까?


이 개고생을 하면서. 대체 왜.


나는 학습된 걸까. 사회의 관습에 세뇌당한 걸까. '여성은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라는 사상에 지배당한 걸까.


음, 글쎄.


나는 그냥 행복해지고 싶다.


그리고 나의 행복의 기준은 아이가 있는 삶이다.


이렇게까지 힘들게 노력하며 아이를 원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더 나아가 비웃음까지 보내는 그룹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나도 그들을 이해하긴 힘들지만 폄하하고 싶진 않다. 그러니까 그들도 나를 폄하하지 않았으면 한다.


다들 자기 자신만의 행복이 있는 거니까.




그리고 여기서 또 다른 본질적인 문제가 튀어나온다. 내가 아이를 낳아서 나는 행복해질지도 모르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 그 아이는 이 세상에서 행복할까? 그 아이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이 문제는 아직도 물음표. 답은 미래의 시간만이 알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를레르의 시 '축복' 중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뱃속에 속죗거리를 잉태시킨
그 덧없는 쾌락의 밤이 저주스럽구나!
고작 내 한심스런 남편의 미움거리가 되고자
수많은 여자 중에 내가 선택되었기에,
이 오그라든 괴물을 연애편지처럼
타오르는 불꽃 속에 던지지도 못하나니.


이런 구절이 있는 시의 제목이 '축복'이라니 참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아이는 뱃속에서 엄마의 몸을 뜯어먹고 자란다. 말 그대로 엄마의 영양분을 좀먹어 간다. 그렇다. 임신과 출산은 목숨을 건 행위다. 육아의 과정 역시 정신적 고통이 크다고 항상 들어왔다.


나는 왜 그 리스크를 떠안고서 아이를 낳고 싶을까. 왜.


저주가 축복이 될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닐까. 고통의 연속인 인생 속에서 잠시 피어오르는 아이의 웃음을 기대하기에. 항상 그 아이를 웃게 해주고 싶기 때문에. 그 아이의 아이가 태어나고 그 웃음을 물려주길 바라기에.




올해가 이제 2달 남짓 남았다.


지금 나는 모든 난임치료를 멈췄다.


더 이상 병원도 가지 않을 것이고,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올해 남은 시간 동안은.






다시 일기장을 펼쳐 날짜를 확인해보니 일출을 보러 바다를 다녀오고 2주 뒤에 이 일기를 썼네. 그 사이 별생각을 다했네 나도 참.

항상 말하지만 그동안 수고했어. 좀 쉬면 어때. 토닥토닥.

<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한마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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