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천변을 따라 걷다 보니, 어린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가 보였다. 낙우송과 헷갈리는데 인터넷을 찾아보니 잎이 마주 대하여 나면 메타세쿼이아이고 어긋나게 나면 낙우송이라 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니 메타세쿼이아였다. 이 나무가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은 나무 몸통 부위에 나 있는 상처 자국, 옹이들 때문이었다. 비교적 큰 옹이들인걸 보니 제법 크게 자랐을 때 가지가 꺾여 나간 듯했다. 몸통에서 가지들이 잘려 나가게 되면 치유되는 과정에서 그 밑동 부분이 나무 안으로 단단하게 뭉쳐지면서 옹이가 된다고 한다. 아픔을 거친 치유의 과정에서 형성된 상흔 이리라. 이렇게 형성된 옹이가 있는 것에 대해 목재를 다루는 분들이나 나무 가구를 구매하려는 사람들 간에 이견이 있는 모양이다. 어떤 이들은 이 옹이 부분이 있는 모습이 매끄럽지 못하다고 싫어하고 목재를 다루는 어떤 분들은 단단하여 가공하기 불편하므로 선호하지 않는 분도 있는 것 같다. 이 옹이 부분이 가끔 떨어져 나가 목재가 구멍이 나기도 하는 모양이기도 하고. 그런데 어떤 분들은 옹이가 있어야 자연스럽고 나무 답다고 좋아하시는 분도 계시고, 상처를 받고 자라온 인생의 모습 같다고 애틋해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인생의 여정을 살다 보면 아픔의 시기들이 있다. 시련이 닥쳐올 때, 나무 가지가 잘려 나갈 때 오는 고통의 순간들. 어떤 환경은 잠시지만 어떤 환경은 수년간 지속되기도 한다. 때로는 하나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여러 환경들이 몰아닥치기도 한다. 물론 우리의 인생의 여정을 마쳐야 하는 환경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내게도 당신에게도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 그런 환경이 온다면, 생명을 창조하거나 더하게 할 수 없는 우리 사람으로서는 겸손히 받아들일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그 많은 시련과 환란을 통과하였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
형제님들, 여러분은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힘에 겹도록 극심한 압박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져,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단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9)
도공이 도자기를 구울 때 용도에 맞게 형태를 짓고, 거기에 아름다움으로 덧칠하고 초벌구이를 거쳐 유약을 바른 후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에 집어넣는다. 몇 도 씨로 며칠을 구울지는, 그리고 한번 구울 지 여러 번 구울 지는 도공의 마음에 달려 있다. 청자는 1200도 넘는 온도에서 수주 간 구워 진다고 한다. 우리에게 온 환경들은 당할 때 아프고 힘들고 살 소망이 없는 것 같지만 결국 그 과정을 감사함으로 통과할 때 옹이 같이 단단한 상흔을 갖게 되고 우린 더 아름다운 그릇으로 되어가는 것이다.
바닷가에 서 있으면 파도가 끊임없이 몰려오듯, 크고 작은 환경들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난다. 때론 태풍처럼 일려 오기도 한다. 이럴 때 아프지만 우린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면 옹이같이 단단한 것이 우리 안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환경을 원망하지 말고 하늘을 탓하지 말자. 불가마에 들어간 도자기처럼 이 과정을 통과하자. 아프지만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