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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Sep 02. 2020

사랑하고파

 글의 제목을 ‘사랑 고파’라고 하고 싶었는데 아직 이런 표현은 표준어가 아닌 듯싶어 일단 제목을 ‘사랑하고파’로 정하였다. 그런데 이는 내가 다른 어떤 사람이나 대상을 능동적으로 사랑하는 것만 표현하니 부족하다. 사랑이란 상대적 교감이 아닌가? ‘사랑받고파’하게 되면 수동적 의미만 전달되니 성에 안찬다. 주고받는 것을 다 포함한 의미로, 우리 안에 사랑 주머니가 비어 있어 '사랑 고파'란 말을 썼으면 하는데 아직은 고프다란 말이 형용사로써는 '배 고프다'에만 쓸 수 있고 동사 뒤에 나오는 가고파라든지 보고파라는 식의 용법만이 표준적 사용례라고 한다. 국어 학자들에게 주고받는, 교감이 있는 사랑에 대한 갈증을 표현할 적절한 말을 만들어 달라고 하고 싶다.


 어제 아내가 카톡으로 동영상을 보내주었는데, 동물들이 사람에게 달려와 허그를 하며 껴안고 안락하고 편안하게 있는 장면들을 모아둔 것이었다. 그 동영상의 제목은 ‘모두가 사랑입니다’였다. 어린 나귀가 아이에게 다가와 목을 서로 비켜 맞대고 허그하는 장면과 이어서 염소, 사자 심지어 거위와 칠면조까지 사람과 꼭 껴안고 가만히 편하게 있는 장면들 그리고 새끼 고양이와 돌고래가 서로 조우하며 관심하는 장면들이 담겨 있었다. 제목에 걸맞은 장면들이었다.


 나의 아버님께서는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교육자이셨다. 평생 아버님께서 나를 그렇게 꼭 안아주신 기억은 없다. 누님들도 가끔 이런 방면에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다 큰 처녀가 되었을 때 아버님과 함께 걷다가 슬쩍  팔짱을 끼면 슬그머니 그 팔을 떼어 놓으신다고 말이다. 그때 우리의 아버님들은 우리를 그렇게 대하셨다. 그럼 우리 세대는 어떤가? 나도 두 딸이 어렸을 때 그렇게 살갑게 대해 주진 못한 것 같다. 물론 안아도 주고 볼에 뽀뽀도 해주지만 그렇게 자연스럽진 않다. 우리 몸에는 이런 표현이 그다지 익숙하진 않은 것이다. 마음속으론 사랑하지만 표현은 미치지 못한다.


 미국 연수 중에 내가 있던 연구실에 방학을 이용하여 학생인턴이 수주 간 머문 적이 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학생 때 직장에 인턴으로 들어가 활발히 활동을 하며 사회를 배우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지만,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문화는 없던 때였던 터라 내겐 생소하게 보였다. 우리 연구실로 배정된 학생은 멕시칸 계통의 여학생이었는데 키는 나와 유사했으나 체구는 나의 두 배는 되었다. 같이 연구과제를 수행한 것은 아니나 연구실이 넓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지나며 동선이 겹치고 인사를 나누곤 하였다. 어느 날 연구실 코디네이터가 그 학생이 방학기간이 다 끝나고 그동안 연구실에서 공부한 것을 발표하는데 같이 가겠냐 해서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발표장으로 갔다. 가보니 수십 명의 학생들이 학술대회를 방불케 할 정도로 자신들이 동참한 과제들을 발표하고 있었다. 그 수준이 학생들의 발표라 생각하기엔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빽빽이 좌석에 앉아 각 파트의 연구자들이 응원하러 나와 있었다. 아, 이 사람들은 얼마나 서로 관심하고 격려하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가? 우리나라 같으면 지금도 학생 인턴은 잔 심부름이나 하고 문서나 이동시킨다고 한다. 다는 아니겠지만, 어디선가 이들과 같이 인턴의 사회 경험의 질적 수준을 높이고자 하는 곳도 있겠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들과 본 광경은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 이 시점에도 말이다. 드디어 우리 연구실의 인턴이 발표하고 내려왔고 우리 동료 연구진들은 힘껏 박수를 쳤다. 그런데 이 친구가 단상에서 내려와서 "닥터 리" 하며 나를 와락 안아주었다. 물론 나만이 아니라 우리 연구진 한 사람 한 사람 꼭 안아준 것이다. 어떤 사람을 안는 것이 나의 아내와 가족 이외에는 흔한 일이 아니므로 순간 무척 당황했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깊은 마음속에 정이랄까 생명체 간의 소통이랄까 이런 기쁜 느낌이었다. 전혀 이성 간의 어떤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직장의 특성상 현장에 있는 임상의사들이 전 시간 상근으로 근무하다가 병원이나 대학의 교수로 가기도 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또한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시다 상근으로 들어오기도 하곤 한다. 한 번은 어떤 여자 의사 선생님이 상당기간 근무하다 대학으로 가게 되어 인사를 왔다. 그런데 이별을 아쉬워하며 허그를 해달라고 하였다. 연배로 보면 한참 후배인 조카뻘의 친구였는데 다소 맘 속으로 당황하였지만 허그해주면서 그곳에 가서도 잘 지내라고 인사를 나누었다. 겉으로 보기에 똑 부러지고 자기 의사표시가 분명한 친구였는데 그를 보내면서 속으로 ‘아, 외로웠구나. 그동안 참 외로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동료들과 어울리며 밥도 사주곤 하였었고 소소하게 관심 가져주곤 하였었다. 의사 사회는 연배가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들에게 밥을 사는 것은 수련 기간에 몸에 밴 것이다. 인턴을 레지던트가, 레지던트는 전임의가, 전임의는 교수들이 밥 사는 것은 수련기간 내내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회 나와서도 으레 그러려니 한다.


 며칠 전에는 직장 동료 중 임산부인 한 직원이 방문을 두드렸다. 이번에 출산 휴가 들어가게 되어 인사를 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작은 비닐에 담긴 선물을 주었다. 마스크 걸이였다. 그러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면서 그동안 관심 가져 주어 고마워서 한동안 나오지 못하게 되니 인사를 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맘 같아서는 이번에 내가 먼저 허그를 꼬옥 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몸에 밴 것이 그렇고, 사회 문화가 그렇고, 특히 요새 성추행 등의 사회적 문제도 그렇고 하여 출산을 잘하고 아기도 잘 키우라고 말로만 인사를 나누었다.


 ‘그러므로 너의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둘째 가는 계명은 이렇습니다. ‘너의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이 두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이 없습니다. (마가복음 12:30-31)


 자기 자신 만이 사랑받으면 행복해지는 것이라 착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꼭 그렇게 생각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관점과 배움이 없기 때문에, 태어나서 그렇게 자라왔기 때문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네가 행복해지는 비결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 적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다른 사람은 소 닭 보듯이 한다. 그리곤 외로워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매개가 되었던 '일'이 끝나면 다시는 돌아보지 않고 '관계'가 끊어진다. 심지어 큰 도움을 받았던 사람과의 관계 조차 말이다.


 오늘 한번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내게 관심을 주었던, 내가 도움을 받았던,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던 과거의 우리의 동료, 상사, 후배 그리고 친구들. 그리고 마음에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어보자, 그동안 잘 있었냐고? 따뜻한 마음의 허그를 하며 안부를 물어보자. 전화가 쑥스러우면 문자 메시지나 카톡 한 줄이라도 보내 보자 '사랑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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