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소통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렇게 지어졌다. 외롭고 고독하다고 푸념할 일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시간이 좀 더 허락한다면 야외로 나가 강변이나 숲 속 산길을 함께 걸어보라. 그리고 두부찌개나 산채나물에 따뜻한 밥한 그릇을 같이 먹어보라. 지나가다 길가에 핀 꽃과 인사하면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안녕’하고 아침 일찍 피어난 나팔꽃에 인사해보라. 그러다 길가에 지천으로 핀 황 코스모스에게도 인사해 보라. 하이~~~ 무언가 나로 잔잔하고 미세하게 웃음 짓게 하는 응답이 있다.
지나가는 개들도 나를 기쁘게 한다. 여기저기 치우지 않은 분변을 보면 기분이 나쁘다가도, 그 원인이 되는 녀석들을 맞대고 보면 이내 기분이 좋아지고, 사랑스럽게만 느껴진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를 키운다. 가족, 주로 모든 일의 뒤치다꺼리가 결국 돌아오는 엄마의 강한 반대에 직면하면 새라도, 그것도 안되면 수조에 물고기 몇 마리라도 키우려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리 위에서 흐르는 시내에 먹이를 던져 주어 물고기들이 항상 그 자리에 모여 기다리게 만들고, 닭둘기가 된다고 그리하지 마라 해도 꼭 비둘기들에게 빵 부스러기를 만들어와 던져주고, 귀찮은 일을 마다하며 집사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개나 고양이를 키우고, 고생하며 번 월급을 부모에게 선물을 사드리지 못할 망정, 애완동물 먹이를 사고 미장원에도 데려간다.
그래서 우린 카톡을 하고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누르고, 누군가를 팔로잉하고 누군가는 나의 팔로워가 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 있으므로 살아있는 무언가와의 끊임없는 교감을 원하는 무언가가 우리 존재 안에 있다는 것을 인류 역사가, 집단 데이터가 입증해준다. 이 법칙에 대해 논쟁할 필요가 없다.
살아있다는 것, 생명체는 끊임없는 관계 맺음을 요구한다. 단지 지나치며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기쁜, 무언가의 교류. 자신 만을 사랑하고 유일한 우주의 의미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가장 초라하고 볼품없고, 우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삐뚤어지고 괴팍한 기질들 때문에 대화를 좀 하다 보면, 조금 길을 같이 걷다 보면 이내 우리는 부딪치고 불쾌해지고 마음이 상하게 되곤 한다. 그래서 다신 만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게 된다. 하지만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일 깊이 깨닫는 다면 다른 사람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고,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처럼 보였던 타인의 어떤 부분도 그다지 나를 괴롭게 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해 아래 하나님 자신 외에는 만족하게 할 수 없는, 역대로 목적을 갖고 역사해온 신성하게 심긴 감각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He has made everything beautiful in its time. He also has planted eternity in men’s hearts and minds [divinely implanted sense of purpose working through the ages which nothing under the sun but God alone can satisfy], yet so that men cannot find out what God has done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전도서 3:11, 확장 역)
직업상 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던 나로서는 어느 정도 관계가 형성되고, 약간 사적인 이야기와 다소 진지한 이야기도 나눌 정도가 되었다고 느낄 때, 지나가듯 묻곤 한다. "크리스천이시지요?" 상대의 반응은 이렇다. "아니요", "음, 저는 가톨릭 신자인데요", 아니면 "네, 크리스천인데 요즘 잘 생활은 못해요". 대게 이런 세 반응 중 하나인 경우가 팔구십 퍼센트는 되는 것 같다. 아니라고 말하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아니라고요? 기적이군요.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수 있지요? 놀랍군요. 저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데.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것이고 기적적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이 생긴다고 하는데, 저는 사람이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기적적인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말하면 상대는 환하게 웃으며 "그래요?" 하고 반문한다. 오해하지 마시라. 나는 상대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강요한다거나, 믿지 않으면 당신은 지옥에 간다고 말하려는 의도가 없다. 외적으로는 농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진담인 말을 한 것이다. 인생의 2/3를 넘게 살아온 나로서는 인생을 한 마디로 정리하는 말을 하라고 한다면 “하나님과 정상이면, 모든 것이 정상이다.”라는 말로 답하겠다. 내 묘비에 이 말을 적어달라.
이런 이야기를 대학생들에게 언제가 들려주었는데, 한동안 지난 후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면서 상대를 미러클 보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상대가 하나님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때 미러클 보이라 부르며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아 대학생들에게 이 말이 들어가니, 저렇게 나오는구나 하며, 신성한 농담 같아 보여 경탄을 금치 못하였다.
인생을 살아오며 많은 일들이 발생하고 많은 고난이 있고 인간으로 감내하기 힘든 환경들도 만난다. 환경이 오면 몰아서 오기도 한다. 마치 죽어라 죽어라 하는 것 같이. 입이 바짝바짝 마르고 쓴 내가 난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사랑하는 가족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픈 것이 낫겠다 싶기도 하다. 바닷가에 서 있으면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처럼 어려운 환경은 끊임없이 밀려온다. 때론 폭풍이 되어 육지를 집어삼킬 듯 우르렁 거리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나의 상황을 의뢰하고 의탁할 존재가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 한동안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로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고민들은 주로 내가 그들의 상황이 너무 딱한데 내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기에 턱없이 부족하여 그들의 상태를 지나가야 할 때에 죄책감과 맘에 어려움이 엄습하고 했고, 그래서 차라리 외면하듯 지나가기도 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는 나 자신도 돌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데 그런 내가 다른 사람의 문제를 어떻게 근본적으로 짊어질 수 있단 말인가? 나의 문제를 의탁할 존재, 나 자신을 의뢰할 존재를 찾으니 그때부터는 쓴 물들이 달게 되었고, 큰 흉흉한 파도들이 어느새 발아래 있게 되었고, 어려움을 만난 사람 옆에 조용히 서서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에도 주말이 되면 아침 일찍이 지인들과 함께 걸어볼 생각이다. 넓은 야외에 마스크를 하고 사회적 거리를 두고, 음식을 먹을 때는 멀리 떨어져서 말하지 않고, 자연을 벗 삼아 걸어 볼 예정이다. 그러면 따뜻한 햇살이 우릴 비출 것이고, 이마에 땀이 나더라도 산들바람이 와서 닦아줄 것이며, 하얗게 핀 여름 이름 모를 꽃들은 우릴 반겨줄 것이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걸어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