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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무 Aug 27. 2020

진리가 무엇이냐?

 “Quid est veritas(진리가 무엇이냐)?” 빌라도가 던진 질문이다. 예수라는 이름의 유대의 왕이라 소문난 한 사람을 심판해야 할, 꿈자리가 좋지 않으므로 그에게 아무 상관도 말라는 그의 아내의 말에 흔들리고 있었던 한 사람, 로마제국의 당시 티베리우스 황제의 유대 행정관으로 세기의 재판관으로 앉아 있던 빌라도의 질문이었다. 아무리 심문하여도 죄명이 없었다. 유대인들은 사형을 시키라고 민란이 날 정도로 거센 요구를 하였지만, 그에게서 조금의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그대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해 태어났고, 또한 그것을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 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진리가 무엇이냐?


 진리는 헬라어로  ἀλήθεια(알레쎄이아)인데 영어로 진리, 실재, 사실, 확실함으로 번역되었다. 빌라도가 던진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인류의 질문이었다.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고자 했던 사람들, 변치 않는 절대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탐구했던 사람들, 그래서 진리가 무엇인지 그 자체를 알고 싶어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갈급하고 추구하고 밝히고 싶었던 명제, 진리. 학문의 전당인 대학에서는 진리가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가르치려 애써왔다. 진리란 무엇일까? 스탠퍼드 대학의 철학에 대한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진리에 대한 십여 가지 이론과 수십 명의 철학자들의 주장들을 언급해 놓았다. 그 정리된 글을 읽다 보니 진리가 무엇인지 더 오리무중이 되었다.


 진리란 이렇게 이해하기 힘든 것일까? 철학자들의 추구 명제만을 위한 것이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우리 같은 사람들과 진리는 무관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2000년 전 예수께서는 진리를 위해 오셨을까? 진리를 여러 유수한 영어 사전들을 참고하여 ‘참된 것의 실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보다 접근할 수 있는 것,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사과 사진을 놓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사과’라고 답할 것이다. 그런데 ‘사과라면 드세요’ 하면 먹을 수 없다. 왜냐하면 실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짜 사과를 놓고 ‘무엇이냐?’고 물으면 동일하게 ‘사과’라고 답할 것이다. ‘그럼 드세요’라고 하면 덥석 받아 한입 베어 먹으면 그 상큼함과 신선케 하는 향과 달콤함이 입안에 가득 퍼질 것이고, 기운이 없었던 내가 사과를 먹어 원기를 회복하고 기쁘게 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실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진리라는 단어는 실재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딸의 아버지인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지에 대해 전혀 관점도 없고 생각도 없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 생활을 하다가 자녀를 갖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러다 두 아이가 생겼는데 막상 어떻게 아버지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특히 큰 아이에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도 자주 이런 식의 말을 하곤 하였다. “이제 6살이잖아,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인제 초등학생이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해야지.” “2학년이 되었잖아 그런데?” 그러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었을 때 초등학교 때에는 내가 그런 말을 어떤 제한도 없이 할 때, 연약하고 죄송해하고 고개 숙이던 그 딸아이였는데, 내가 이전과 동일한 어조로 이야기할 때 무언가 그 아이 안에 색다른 어떤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어서 내가 참 잘못해왔구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큰 아이를 어렸을 때부터 대학생 수준으로 보고 요구해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내가 아버지이지만 아버지의 실재가 없었고, 참 아버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큰 아이에게 사죄를 하였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지나친 것이었다. 용서해다오.” 그러나, 몸에 밴 나의 태도로 인하여 그 이후에도 수없이 동일한 사과를 해야 했다. 근 6개월이 지나서야 그런 태도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남편으로서 분명 아내를 사랑하지만 내게 남편의 참된 실재가 있는가? 직장의 한 구성원으로서 내가 참되게 생활하고 있는가? 사람들과의 갈등 속에 간혹 내게 부당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나는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서갈 때, 나는 그러한 그에게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며 감상할 수 있는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실재)가 충만하였다. 요한복음 1:14


 우리는 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싶고, 환한 빛 가운데 있고 싶고, 흠이 없는 생활을 하고 싶고, 남편으로써, 아내로서,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합당한 그런 사람이고 싶지만 살아 나타내는 나의 모습은 그 반대의 경우가 왕왕 있으니, 사과의 모양은 있으나 그 실재가 없는 사진 같을 뿐이다.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말에 답하긴 어려우나, ‘내게 진리(실재)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쉽게 답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게 참된 빛이 있는가? 내게 참된 사랑이 있는가? 내게 인내가 있는가? 나는 참된 아버지인가? 나는 참된 남편인가?” 이렇게 물어본다면 “아니오, 내게 실재가 없습니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진리에 대한 철학적 탐구와 그 정의를 찾아 헤매는 것보다, 내게 실재가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진리에 이르게 되는 더 쉬운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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