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3)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일까? 어른과 어린아이의 차이를 알지 못하면 어린아이 같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렇게 되면 돌이켜 어린아이 같이 되려고 하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 아닌가? 여기서 예수께서 어린아이가 되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미 생물학적으로 어른이 된 사람이 다시 어린아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한 일을 여기서 요구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어린아이의 원칙’을 언급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피터 팬 신드롬(Peter Pan syndrome)에 걸린 어른들이 되라는 말씀이 아니시다. 어른이 되었지만 어른이 감당해야 할 책무에 관심이 없고 옷차림이나 행동거지가 어린이같이 하고 다니라는 말씀도 아니다. 예수께서는 어려운 말과 철학과 논리로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논하지 않으셨다.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주제로 다루어야 알 수 있는 말씀으로 말하지 않으셨다. 그야말로 어린아이라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말씀하신 것이다. 어린아이 같지 않으면…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를 알아야 어린아이의 원칙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는가?
어렸을 때 많이 듣던 이야기는 ‘희망이 뭐야? 장래 소망이 뭐야’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그렇게 내게 묻는 사람은 없다. 어른이 되어버린 것이다. 굳이 희망과 소망이 뭔지 물을 일이 없다. 어른은 쓰인 것이 많은 사람, 마치 신문지 같이 빼곡히 많은 것들로 쓰여, 더 이상 쓸 여백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을 일도 없고, 듣고 싶지도 않은 사람이다. 아는 것이 많고, 체험한 것이 많고, 들은 것이 많아 어떤 것에 대해 말하라 하면 줄줄이 많은 말을 하나, 이미 다 낡은 것들일 뿐 신선한 것이 없는 사람이다. 궁금한 것도 없고 호기심도 없고 감흥도 없다. 많은 염려와 무기력함으로 가득하다.
어린아이들은 무엇이든 호기심이 많고 알고 싶어 하고 신기해하고 감흥이 많다. 스펀지처럼 흡수력도 뛰어나다. 활기차고 온종일 뛰어다녀도 지칠 줄 모른다. 마치 하얀 백지와 같다. 무엇을 그려도 그려지고 무엇을 써도 분명해진다. 그렇게 하라고 가르친 어른들은, 건널목을 건널 때 빨간 불일 때도 건너고, 손들고 건너지도 않지만, 아이들은 초록 불에 고사리 같은 손을 힘껏 들고 웃으며 조잘거리며 걷는다. 그 마음이 환하고 기뻐하고 들뜨고 기분 좋고 늘 새롭다. 그렇다고 어른들의 생각처럼 어린아이들이 이해력이 떨어지거나, 다른 사람을 헤아리지 못한다거나, 마냥 떼를 쓰는 철부지들만은 아니다. 교회의 같은 소그룹에 ‘찬’이라고 하는 어린아이가 있는데, 손주도 없는 나를 ‘하비 하비’라고 부르며 따른다. 찬이 엄마가 둘째 아이를 얻는 과정에서 수주 간 엄마와 떨어진 것이 마음에 상처가 된 것인지 그 이후론 엄마와 떨어지는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곤 했다. 어느 날 소그룹 모임에 참석하여 거실에 앉아 있었는데, 집 밖에서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놀라 내려가 보니 찬이가 다른 분과 함께 먼저 도착했고 엄마는 잠시 후 동생과 함께 온다는 것이었다. 먼저 따라나서긴 했지만 엄마가 오기 전까지는 집에 들어오지 않겠다고 우는 것이었다. 그때가 한겨울에 무척 추운 날씨였는데 와이셔츠 바람으로 나왔던 나는 찬이를 안고 같이 오신 분을 먼저 들여보내고 찬이에게 엄마는 곧 오실 것이니 집에 들어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울면서 엄마가 와야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여러 번 달래도 전혀 먹히지 않았다. 몸이 점점 더 추워지며 속으로 큰 일 났다 싶었다. 잠시 후 찬이에게 “하비가 너무 추운데, 너무 추어서 힘들어”라고 말했는데 몇 초 후 갑자기 “들어가자” 하며 울음 그치는 것이었다. “그래? 그럼 들어가자 응”하고 신속히 들어왔는데 찬이는 쿨하게 금세 예전 같이 집 안에 들어와 뛰놀고 밝은 표정을 지었다. 그때 너무나 큰 감동이 밀려왔다. 이 작은 아이에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니, 엄마와 떨어지는 것이 너무 힘든 것을 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을 위해 그 마음을 접어놓다니, 정말 가슴이 찡하였다. 이 말을 소그룹 사람들에게 말해 주니 다 놀라며 찬이를 칭찬해 주었다.
이삼 년 전부터 어떤 일을 계기로 나와 아내는 우리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을 훈련하기 시작했다. 이런 훈련을 해보니 우리가 얼마나 단정적이고, 자신의 생각이 항상 옳고, 이견이 있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또한 이런 입장을 얼마나 내려놓기 어려운지를 깨닫곤 한다. 그러면서 구청에서 소리를 높이며 막무가내로 직원들과 싸우시는 할아버지들의 모습이 남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얼마 후의 나의 모습이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런 훈련을 하다 보면 나의 생각과 다른 생각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일리가 있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나의 관점은 참으로 아주 좁은 것이구나, 나는 많은 경우 틀릴 수 있구나 하는 것에 놀라곤 한다. 30년 넘게 살아왔지만 나의 아내 사이에는 아직도 사사건건 이견이 있다. 먹는 것, 어떤 운동을 언제 할 것이지, 빨래하는 것, 어항의 물고기 물 갈아주는 방식, 그 어떤 것도 쉽게 같은 생각을 갖지 못한다. 이런 이견들 속에 내 생각이 옳다고 주장하면 그때부터는 어려움이 생긴다. 신속히 내 생각을 내려놓고, 붙잡지 않고 상대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야기하다 보면 쉽게 공통의 결론을 내린다. 굳이 고집할 이유가 없는 이견들이었던 것이다.
여러분 안에 이 생각을 품으십시오.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었던 생각입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모습으로 존재하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붙잡고 놓지 않아야 할 보배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셔서, 노예의 모습을 가지시어, 사람들과 같은 모양이 되셨으며, 사람의 형태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순종하시어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5-8)
돌이켜 보면 어린아이의 원칙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백이 있는 것이고, 호기심과 알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것이고, 마음 안에 소망이 있고 기쁘고 환한 분위기가 있는 것이고, 신선하고 새로운 마음이 가득한 것이라 생각한다. 어른이 되어가며 이런 마음을 잃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