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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가봐야 할 그랜드 캐년

나의 원픽, 그랜드캐년

by 별빛


내가 다녀온 세 곳의 캐년을 한마디로 표현해 보자면,

브라이스 캐년 = 아름다움

앤털롭 캐년 = 신비로움

그랜드 캐년 = 웅장함

셋 중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나의 원픽은 그랜드 캐년이다.

죽기 전 꼭 가봐야 할 리스트에 빠지지 않고 들어가는 이유가 있었다.



IMG_3803.JPG 한국 시골길의 소처럼이나 흔한 그랜드 캐년의 Moose



앤털롭 캐년을 떠나, 세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그랜드 캐년.

우리를 제일 먼저 맞아준 건, 길옆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무스였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동물을 길 한복판에서 마주치다니...

그 커다란 덩치에 살짝 겁이 난다.

조금 더 다가가 사진을 찍어보고 싶은데, 혹시라도 저 커다란 뿔을 들이대며 달려오진 않을까 하는 걱정에 그만 마음을 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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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큰 뿔이 달린 무스를 좀더 가까이 보고싶어 다가가는 아이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룻밤을 잔다.

일찌감치 서둘러 숙소를 예약한 덕분에 다행히 그랜드 캐년 안의 랏지를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여행 시 숙소에 많은 비중을 두는 편인데, 사실 그랜드 캐년의 야바파이 랏지는 내가 미국 여행 중 묵었던 가장 낡은 숙소였다. 캐년 안에 있는 곳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묵지 않을 곳...

내가 예약할 당시 유일하게 방이 남아있는 캐년 안의 숙소여서 선택의 여지없이 예약한 곳인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큰 불편함은 없었다. 벌레도 없었고, 냄새가 나지도 않았다.

랏지 바로 앞에는 시시 때때로 무스가 등장하여 평화롭게 풀을 뜯어먹는, 자연친화적인 곳이었다.



IMG_3784.JPG 자연의 신비로움



그랜드 캐년의 첫인상은

'우와-'

그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에 거쳐 이런 거대한 자연의 산물이 만들어진 걸까?

새삼 우리가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삶을 살고 있었는지,

자연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내가 모르는 세상은 얼마나 더 크고 놀라울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




IMG_3707.JPG 중간을 가로지르는 파란 강줄기가 보인다.




차로 그랜드 캐년 국립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중간중간 우리가 내리고 싶은 곳들을 골라 산책을 하고 사진을 찍었다.

우리 숙소가 있는 야바파이 포인트는 그랜드 캐년의 사우스림에 위치하는데, 가장 인기가 좋은 관광 포인트인 마더 포인트가 멀지 않다.

마더 포인트에서 내려다보면 콜로라도 강이 보이는데, 이 곳은 일출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딱 하룻밤 이곳에 자니, 우리가 일출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뿐이다.

내일 아침 이곳에 와서 일출을 보자고 약속하며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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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다는 표현말고 무엇이 있을까?




캐년 안에서의 식사는 매우 한정적이다.

한 달간의 미국 여행 기간 중 유일하게 살이 빠졌던 시기가 이때였는데,

라스베가스를 출발해 캐년을 다 돌고 다시 라스베가스로 돌아갔을 때, 옷이 헐렁해지고 사진발이 잘 받기 시작했다. 얼굴살이 쏙 빠진 거다.

이유는 간단하다. 캐년 안의 식당들은 맛이 없었다는 사실....

대부분의 메뉴는 햄버거, 핫독, 스파게티...

매일 같은 메뉴를 돌려먹다 보니 느끼함이 목까지 차올라 한국음식 생각이 간절했다.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음식점 하나쯤은 찾아볼 수 있지만, 라스베가스를 떠난 이후 한 번도 보질 못했다.

다음에 캐년 여행을 하게 된다면 컵밥 같은 한국 음식을 잔뜩 챙겨 와야지 다짐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날, 여러 개의 알람을 맞춰뒀지만, 우린 일어나지 못했다.

유일한 한 번의 기회였던 그랜드 캐년에서의 일출 보기를 실패하고 말았다.

매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모두 지쳐있었던 것 같다.

다음에는 우리 이 곳으로 캠핑을 오자!

조금 여유 있게 며칠 묵으며 밤하늘의 별도 보고, 모닥불 피우고 불멍도 하고,

맛있는 음식도 직접 만들어 먹고!

그리고 매일 아침 일출을 보고, 캐년 안을 트래킹 하자.

아쉬움을 뒤로하고, 몇 곳의 뷰 포인트를 차로 돌아보고 우리는 그랜드 캐년을 떠나 라스베가스로 향했다.



IMG_9311.JPG 그랜드 캐년 표지판 앞에서 빼놓지 않고 기념샷을 찍었다.



오랫동안 단조로운 섬 생활을 하며, 산과 계곡이 늘 그리웠다.

습하고 무거운 아일랜드 날씨가 아닌, 건조하고 상쾌한 숲 속의 가벼운 공기를 느끼고 싶었다.

여행을 시작하고 지난 일주일, 나는 내가 살던 곳과 완벽히 다른 공기를 마시며 그간의 갈증을 해소하고 있다.

매 순간이 아쉽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한 순간조차도 내게는 소중하다.

끝도 없는 사막길을 달리다 딸과 함께 은반지를 사서 나눠 낀 하얀 천막의 인디언 노점상,

엄청난 크기의 밭을 통과하며 알록달록 화려한 색깔에 홀려 일주일을 먹고도 남을 만큼의 충동구매를 했던 과일 매대, 아무도 없는 길을 달리다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 멋진 갈대밭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던 곳, 화장실이 급해 제일 먼저 나오는 표지판을 보고 들어간 푸른 잔디가 아름답게 깔린 그 휴게소.

어느 하나 소홀히 놓칠 수 없는 나의 소중한 추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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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돌밭길을 달리다 발견한 인디언 노점상에서 딸과 하나씩 은반지를 골랐다.



오래도록 준비했고, 간절히 기다렸던 그 시간을 지나가며

나는 40년 내 인생의 그 어떤 순간보다 행복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어느새 그 긴 길의 끝.... 저 멀리 라스베가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문명의 손길이 차마 건드릴 수 조차 없는 그 광활한 자연의 예술품인 캐년을 뒤로하고,

화려하고 반짝이는 도시가 다시 내 눈에 들어왔다.

왠지 아쉽다.



우린 그간 못 먹은 한을 풀기라도 하듯 아름다운 윈 호텔에서 배가 터지도록 뷔페를 먹고,

휘황 찬란한 라스베가스의 밤거리를 산책했다.


니콜라스 케이지와 엘리자베스 슈의 '라스베가스를 떠나며'가 생각나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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