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과 계곡의 매력
어렸을 적 나는 산의 매력을 몰랐다.
나무만 가득하고 곳곳에서 벌레가 튀어나오는, 돌부리 가득한 산을 왜 힘들게 오르며 좋다고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얀 모래사장에 부서지는 파도. 야자수 그늘 아래 앉아 뜨거운 태양을 피하는 상상만으로도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가는 바다가 단연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괌에 살게 되면서 18년을 바다와 야자수에 둘러싸여 매일을 보냈고,
나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산을 갈망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산을 보지 못했다.
산길을 걷는 느낌이 어땠는지, 산속에선 무슨 냄새가 났는지, 그 공기가 촉촉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 돌이 콕콕 박힌 울퉁불퉁한 오르막을 걷고, 중간중간 흐르는 계곡물에 손을 담가보고,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멋진 경치를 내 눈에 담고 싶었다.
샌프란 시스코를 떠나 요세미티로 가기 위해 예약해둔 렌터카를 찾았다.
핸드폰 거치대를 차에 장착하고, 구글맵을 켰다. 괌에서부터 들고 온 하얀 아이스박스에 얼음을 사서 가득 담고 물과 음료수, 과일 등을 넣어 뒷좌석 중간에 간이 냉장고를 만들었다.
교대로 운전을 할 나와 남편을 위해 제일 큰 보냉병에 커피를 뽑아 넣고, 호텔에서 얼음을 꽉 채워 나왔었다.
샌프란에서 요세미티까지는 약 두 시간 거리로 그리 멀지는 않았지만, 미국의 복잡한 하이웨이를 뚫고 달릴 생각을 하니 살짝 긴장이 됐다.
샌프란의 운전자들은 매우 난폭했다. 어쩌면 그곳이 우리가 미국에서 첫 운전을 시작한 곳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시속 80-90마일로 달려대며 70으로 달리는 우리에게 손가락질과 경적을 울려댔다.
저길로 빠져나갔어야 했는데, 놓쳐버렸다...
빵빵대는 경적소리에 영혼이 나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나 못하겠어... 오빠가 해.'
간신히 하이웨이를 빠져나와 길 한편에 차를 세우고 남편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피셔맨스 와프를 출발해 복잡한 도로를 빠져나오자 한적한 시골길이 계속 이어졌다.
그림같이 멋진 갈대밭을 달리고 또 달렸다.
난폭한 운전자들로 잔뜩 기장되었던 어깨가 자연스럽게 내려갔다.
나도 모르게 찌푸려졌던 양미간의 주름도 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끝이 안 보이게 쭉 뻗은 길을 달리며 중간중간 차를 세워 사진도 찍었다.
여행 중-
세상 가장 달콤한 말이다.
우린 지금 여행 중이다. 해야 할 모든 일에서 벗어나 그 순간순간을 즐길 수 있는 자유.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먹고 싶을 것을 먹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차를 타고 달리는 이 순간마저 감사할 따름이다.
어느새 차는 꼬불 꼬불 숲 속으로 접어들었다.
구글맵은 우리의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주었다.
요세미티 뷰 랏지.
오래된 숲 속의 랏지지만, 요세미티 국립공원 안에 있는 몇 안 되는 숙소라 인기가 많은 곳이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체크인을 하고, 지도와 방키를 받아 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조금은 오래된 느낌의 산장 같은 방이다.
작지만 알찬 키친도 있고, 캐비닛 안에는 그릇도 다 갖춰져 있었다. 발코니의 문을 열어보니 거의 방의 절반만 한 사이즈의 테라스가 있고 바로 옆에는 레버넌트에 나올법한 멋진 강이 흐르고 있었다.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대충 짐을 옮기고, 가볍게 근처를 돌아보기로 했다.
산속의 차가운 공기는 코끝을 찡하게 했고, 내가 궁금해했던 산내음은 너무도 상큼했다.
물이 말랐을 때 오면 계곡의 물이 쫄쫄 흐르는 수준이라고 했었는데, 지금은 물이 아주 우렁찬 소리를 내며 흘러 내려가고 있었다. 그 물이 어찌나 맑고 투명한지, 당장이라도 뛰어들어 물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렸을 적 남한산성에 가면 꼭 계곡에 발 담그고 놀았었는데....
왠지 수박이라도 하나 띄워놓고 돗자리 피고 앉으면 완벽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해가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름대로 공기 좋은 곳이라는 괌에 살면서 보던 하늘의 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다음날, 본격적인 관광을 시작했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입장하려면 먼저 입장권을 끊어야 하는데, 1일권, 1주일권, 1년권 이 있다.
1년권의 경우 미국 내의 국립공원을 모두 이용할 수 있는 멤버십으로, 여행 기간이 1주일 이상이고 두 곳 이상의 국립공원을 방문한다면 당연히 1년권을 이용하는 것이 더 저렴하다.
우린 처음에 모르고 2박 3일간 지낼 곳이라 1주일권을 끊었는데, 나중에 캐년에 가서 차액을 지불하고 1년권으로 바꿨다. 영수증만 가지고 있으면 차액으로 멤버십 업그레이드가 가능하니, 영수증은 잘 챙겨두는 편이 좋다.
비지터 센터에서 받은 안내문을 꼼꼼히 살피고, 가고 싶은 곳들을 정했다.
차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공원 내를 순환하는 버스를 이용하기도 하고, 우리 차로 갈 수 있는 곳은 차로 가기도 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들이 무척이나 많아서, 주차장은 늘 만원이었다.
여름철 요세미티는 늘 사람이 많다고 한다.
돌이 콕콕 박힌 울퉁불퉁한 산길을 비틀거리며 걷고,
그 옆을 흐르는 얼음 같은 계곡물에 손을 담그고 더위를 식혔다.
미스트처럼 뿜어대던 폭포수의 물줄기를 얼굴에 맞으며 풀내음 가득한 공기를 가슴 깊이 담았다.
거울처럼 비치는 맑은 호숫가에 앉아 아이들이 신나게 물놀이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한없이 행복했다.
땀냄새와 흙냄새가 가득 섞인 순환버스에 간신히 비집고 들어가 타, 배낭을 메고 먼지를 뒤집어쓴 젊은이들의 해맑은 모습을 보며 부러워하기도 했다.
모든 순간이 아름다웠다.
내가 상상했던 그 모습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해가지면 쌀쌀한 산속의 밤공기마저 완벽했던 요세미티에서의 시간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이른 새벽, 나는 매일 식구들이 깨지 않게 조심조심 일어나
뜨거운 커피를 뽑아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힘차게 흐르는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아직은 파르스름한 어둠이 살짝 남아있는 하늘에 선홍빛 해가 아주 천천히 떠오르는 모습을 매일 지켜봤다.
산속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커피의 하얀 김을 손으로 감싸며 두터운 카디건의 앞섶을 여미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온전한 나만의 시간.
이 아름답고 경이로운 산속의 일출을 바라보며 머릿속마저 맑게 씻어줄 것 같은 시원한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나는 요세미티와 사랑에 빠졌다.
언젠가 꼭 다시 오고 싶어.
조용히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