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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 Dec 19. 2020

#2 “사랑은 악마이며 불이며 천국이며 지옥이다."

#2


(이 글을 먼저 클릭 하셨다면, 아래 링크를 따라가 1편먼저 읽어주세요.)

https://brunch.co.kr/@sunah69/44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밤 비행기를 타는 기분은 뭔가 로맨틱하다.

한국을 떠나 이곳에 살게 된지 벌써 이십 년 이 되어간다. 그리운 사람들을 마음대로 볼 수 없다는 걸 빼고는 대체적으로 만족한 생활이었다. 나는 실수와 후회가 가득한 한국을 떠나고 싶었었다.

깜깜한 젖은 거리를 홀로 운전해 공항으로 왔다.

아이들과 함께 떠나는 여행에 익숙했던 나는, 혼자 단촐하게 기내용 캐리어 하나를 들고 떠나는 기분이 묘하다.

5년 만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방학마다 한국으로 여행을 가곤 했는데, 아이들이 크고 바쁘게 사느라 몇 년간 한국땅을 밟지 못했다.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고,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단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휴가철이 아닌 평일 비행기 안은 한산 했다.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음악을 들었다.

어쿠스틱 기타의 선율이 아름다운 Extreme의 'More than words'를  듣는다.

오래전 그가 내게 선물해 주었던 앨범.

지상에서 점점 멀어진다. 나의 현실과도 점점 멀어진다.

아스팔트 위의 반짝이는 빗물이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느껴진다.


이 가을이 끝나버리기 전에 그를 만나고 싶었다.

내가 한국에 가는 이유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다.

고요한 기내 안의 푸른빛이 마치 우주 속 같이 느껴진다.

나는 밤 비행기를 좋아한다.

고요한 적막이 흐르는 푸르고 깜깜한 기내의 밤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엄마로 산지 이십 년.... 그동안 나는 성실하게 나의 선택에 책임을 졌다.

나의 임무를 완수했다.

이제 나는 나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했다.


답답한 기내를 벗어나 공항을 나섰다.

싸늘한 늦가을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신다. 아직 해가 채 떠오르지 않은 이른 새벽.

낯익은 이 공기가 너무 그리웠다.

리무진에 몸을 싣고 호텔로 향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가지런히 늘어선 길을 지나, 회색빛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익숙한 공기와 소음, 낯익은 건물들, 나는 버스 창문에 얼굴을 기대고 차가운 한국의 공기를 피부로 느꼈다.


카톡-

그의 메시지다.

화면을 열어 확인하기까지 잠시 망설였다.


'오랜만이다...'


간결한 그의 대답.

그는 나를 잊지 않았다.


호텔에 짐을 두고 서둘러 나왔다.

졸업 후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학교를 보고 싶었다.

그와 나의 추억이 있는 곳.

교문 밖에 서서 멍하니 운동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교복을 입은 풋풋한 아이들이 보인다. 참 예쁘다.

젊고 싱그럽다.

그들의 젊음이 부럽다.

그들의 자유가 부럽다.

무엇이든 꿈꾸고 선택할 수 있는 그들이 정말 부럽다.

재잘대는 저 아이들 틈에 내 모습이 보인다. 단발머리의 교복을 입은, 태양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내가 보인다.


싸늘한 늦가을의 찬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시며 걷는 기분.

참 오랜만이다.

따뜻한 김이 퐁퐁 솟아오르는 뜨겁고 진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오래전 그와 한 번쯤 걸었을법한 먼 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답장을 해야겠다.


'우리 볼래요?'


나는 돌려 말하는 걸 싫어한다.

사지선다 선택의 여지를 주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펼쳐놓은 노트북을 접으며 그의 답변이 채 오기도 전에 다시 카톡을 보냈다.


'학교 앞이에요.'


갑작스레 삼십 년 만에 연락을 해서 지금 당장 보자는 나를 그가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세월 나는 충분히 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느라 정작 내가 하고 싶은 건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나는 그가 나를 보러 와줄 것을 안다.

그는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다.

예쁘게 보이고 싶지만, 제대로 잠을 못 자  푹 꺼진 눈가에 생기가 없어 보인다.

좀 더 일찍 이었으면 좋았을걸....

좀 더 예쁜 모습이었을 때라면 좋았을걸....

세월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내 모습이 비친 유리창을 보며,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순간 그를 만나지 말까? 망설이게 된다.

그의 기억 속의 빛나는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으로만 오래도록 남아야 하는 게 아닐까....


저 멀리 검은 점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

불안한 듯 천천히, 설레듯 빠르게,

그가 내게 다가오고 있다.







그는 여전히 반듯하고 다정하다.

어느 하나 흠잡을 데 없는 그의 모습에 흐뭇함과 아쉬움이 공존한다.

우린 늦가을 차가운 밤공기를 맞으며 오래전 그때처럼 한참을 걸었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그런 것 따윈 묻지 않았다.

그냥 우린 다시 만났고, 그 시절의 우리처럼 함께 걸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아릿한 통증을 느끼며, 때론 나도 모르게 쏟아져 버릴 듯한 눈물을 참으며,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했다.


그를 흔들고, 그의 삶을 휘젓고 싶진 않다. 그저 조용히, 잠시만 그의 삶에 들어가고 싶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나버리기 전에, 이 계절이 바뀌고 하얗게 눈 덮인 겨울이 올 때까지만...

그를 보고 싶었다.

그와 함께한 사계절을 기억하고 싶었다.

그를 보고 설레던 따뜻한 봄날처럼,

그와 함께 행복했던 뜨거운 여름날처럼,

그와 함께 이 가을을, 그리고 겨울을 기억하고 싶었다.

나의 추억을 위해서,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지금 이 순간 그가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와 함께 첫눈을 맞으며 30년 전 그와 함께 걸었던 이 거리를 걷고 있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것

돌이키고 싶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

그는 나에게 그런 추억이다.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현실이 될 수 없는 사람.

아무리 후회해도 다시 선택할 수 없는,

그는 나의 지나간 첫사랑이다.


그와 이별을 하고 그가 얼마나 아파했었는지 알고 있다. 그의 깊은 상처가 치유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 상상할 수 있다. 그에게 첫사랑은 악마일지도 지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 그는 천국이고 불꽃이다. 세상이 무너졌다고 느꼈던 그 순간에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나의 천국, 나의 불꽃.

다시 한번 그 불꽃을 가슴에 품고 싶었다.

나의 천국에서 다정한 그의 말에 위로받고 싶었다.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아온 불쌍한 나에게 그를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에게 지옥 같은 아픔을 안겨주는 악마가 되려고 한다.




다시 만난 그가 조금씩 나를 향하는 걸 알고 있다.

아무런 경계 없는 그의 다정한 눈동자가 나를 보고 미소 짓는다.

가슴이 뛴다. 심장이 멈춘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오래전 실험실에서 그를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그는 반짝이고 있다.

그를 기다리며 가슴이 뛰고, 멀어지는 그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게 된다.

자꾸 욕심이 생긴다.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이미 한번 주어졌던 기회를 놓친 우리에게, 두 번 다시 똑같은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언제나 그렇다.

한번 놓치고 나면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아무리 갖고 싶어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흩어져 나가는 모래알처럼, 그렇게 결국은 사라져 버린다.

처음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타버릴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나는 그래도 그를 안고 싶었다.

그 오래전 나의 잘못된 선택이 오래도록 나를 벌주고, 먼 길을 돌아서야 이렇게 잠시나마 그를 볼 수 있게 했다는 걸 알고 있다.

얼굴이 찢어질 것 같은 매서운 겨울바람이 시린 내 마음만큼이나 안쓰럽다.

아득히 보이는 그의 다정한 미소가 가슴속에 콕콕 가시가 되어 박힌다.

그가 나를 향해 뛰어오고 있다.

주머니에서 뜨겁게 덥혀진 핫팩을 내 손에 쥐어주며, 내 외투 깃을 단단히 여며준다.

이 정도면 되었다.

그를 흔들고 싶진 않다.

이번에도 나는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그에게 다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하고,

그에게 지옥이 될지도 모르는 미래를 남겨주고,

그렇게 나는 이 천국을 떠나갈 것이다.



밤새 내린 눈이 제법 쌓인 그날, 따사로운 햇살에 눈이 부셨다.

이별하기 좋은 날.

나는 정성 들여 화장을 하고, 제일 예쁜 모습으로 그를 만났다.


"나 오늘 밤 돌아가요."


가장 나다운 모습. 나는 늘 이렇다. 즉흥적이고, 변덕쟁이에, 이기적인 악마이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그에게 지옥을 선사하는 중이다.

그의 눈동자가 요동치는 게 보인다.

하지만 괜찮다.

나는 다시 그의 기억 속에 남게 될 테니까...


"내가 너를 어떻게 잊겠니..."


그는 다시 먼 훗날 이런 대답을 하게 될 테니까...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어섰다.

그가 무슨 표정일지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나는 끝까지 악마가 되기로 했다.

곧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나의 존재를 그는 영원히 기억하길 원한다.

어딘가에 살아있을 나를, 그리워하고, 애틋해하며, 간절하게 한 번쯤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며 살게 되기를.


이제 나는 나의 천국을 떠나, 현실로 돌아간다.

이토록 짧은 인생만을 허락한 신을 원망하며...

나는 이제야 비로소 곧 다가올 나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Love is a fiend, a fire, a heaven, a hell
Where pleasure, pain, and sad repentance dwell  

 -Richard Barn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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