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학생이에요- 2편

"하룻밤만 재워주세요"

밀양을 향해 달려가는 기차. 여러 날에 거쳐 장맛비가 쏟아졌기에 창밖 풍경은 온통 물, 물, 물이었다.

그렇게 한껏 젖어 있는 밀양에 도착한 후 그곳을 감상할 새도 없이 또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넘게 달린 뒤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얼음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분명 출발할 때는 시골버스 특유의 북적거림이 가득 차 있었는데 마을을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챙겨 버스를 떠났다. 결국 마지막 정류장인 얼음골에 도착했을 때 버스에 남겨진 사연은 운전기사와 내 이야기 둘 뿐이었다. 기사 아저씨는 이곳이 종점이고, 이 차가 막차이다, 그래서 낼 아침에나 출발한다는 메마른 이야기만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는 갈 곳을 잃었다. 아니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누구에게 물어보고 싶은데 아무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온 동네가 너무 조용했다. 시골에 가면 개 짖는 소리라도 들리는데 이곳은 그것마저 무음모드이다. 잔뜩 흐린 하늘과 코 끝에 스치는 비릿한 비 내음, 적막한 동네를 장악한 굉음 같은 계곡의 물소리뿐, 이곳은 내가 사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 같았다.


난 막다른 골목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막막했다. 아무리 찾아봐도 출구는 보이지 않고 돌아나갈 길도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아 그 막막함의 무게감이 점점 짙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 계획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흔한 간이 매표소도 허름한 점빵도 아무것도 없었다. 쓱~ 눈으로 살펴보니 돈을 내고 머물 수 있는 숙소나 무언가를 사 먹을 수 있는 식당조차 없었다. 한마디로 깡시골이었다. 그 막막한 두려움에 집에 전화를 해 ‘나를 데리러 와 달라’ 하고 싶은 마음도 잠깐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이곳까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떠나왔는지, 내 첫 홀로 여행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첫 과제인 것이다.



난 본능에 끌리 듯 계곡이 내는 소리와 냄새를 따라 걸었다. 휘몰아치며 흐르는 계곡 물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멋진 곳에 집이 한채 보였다. 망설일 새도 없이 난 마당으로 불쑥 들어갔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내 목소리를 계곡의 물소리가 삼켰나 보다. 아무 기척이 없다. 난 조금 전보다 간절함이 담긴 소리로 다시 주인을 찾았다. 곧 방문이 열리며 할머니 한분이 ‘누군데 내 집 마당에 서 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할머니의 푸근한 얼굴에 마음이 놓인 나는 “ 여기 여행 온 학생인데 하룻밤만 재워주세요”라고 숨도 쉬지 않고 말해버렸다.



할머니는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셨다. 그리고는 노인 두 명이 사는 집이라 손님을 재워 줄 만한 방이 마땅치 않다고 거절하셨다. 나는 나하나 누울 수만 있다면 창고라도 좋다, 여기서 재워주지 않으면 길거리에서 자야 한다고 제법 억지도 부렸다. 결국 할머니는 “ 이런데라도 잘 수 있어요?” 라며 방문 하나를 열어 보여 주었다. 그 방은 여러 곡식들과 고추까지 자루에 담겨 잔뜩 쌓여있고 처음 맡아본 냄새까지, 창고처럼 쓰는 방이었다. 그래도 귀퉁이에 나 하나 누울만한 공간은 있어 보였다. 난 충분히 잘 수 있다고, 이런 시골방에서 자 보고 싶었다는 애교까지 보태어 잠자리 획득에 성공했다. 낯선 여행객에게 잠자리를 내 준 할머니의 자상함에 잠시 뭉클해졌지만 바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할머니, 저 밥도 주시면 안 될까요? 마을에 식당이 없더라고요”


“아고, 우린 손님 먹을 만한 찬이 없는데 어쩌지?”


“아뇨, 저 아무거나 잘 먹어요 두 분 드시는데 그냥 숟가락 하나만 얹어서 주시면 돼요”



할머니가 차려 준 밥상엔 시골내음이 가득했다. 할머니는 연신 ‘입에 맞지 않을 텐데 먹을만하냐’라고 걱정해 주셨다. 반찬 중 유난히 내 입맛에 맞는 게 있어서 “ 이게 뭐예요?” 하고 물어보니 “콩잎 장아찌인데 먹을 만 해?”라고 말하며 내 앞으로 밀어주신다. “할머니 콩잎도 먹어요? 깻잎은 먹어봤는데 콩잎은 처음 먹어봐요” 라며 신기해하자 경상도 음식이라고 친절히 설명도 해 주신다. 첫 몇 술은 두 분과의 식사가 조금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담긴 밥상은 긴장과 낯선 불안감도 녹여내는 신비한 마법을 부리는지 종알종알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 재롱이라도 부리듯 내 이야기가 절로 나왔다.



어둠이 내려앉는 평온한 시골마을.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둘러앉아 오래전부터 그래왔던 것처럼 우리는 따뜻한 저녁밥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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