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 아버지한테 죽어"
1985년 8월.
끝없이 쏟아지던 장맛비가 잠시 그쳤다. 역까지 따라 나온 언니는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처럼 쏟아내야 할 말들을 참고 있었다. 난 애써 언니 얼굴을 외면한 채 구름 낀 하늘을 쳐다보았다.
'비를 맞으며 떠나고 싶었는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 내가 끌어안고 있는 고민들이 다 떠내려 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내 나이 열아홉, 대학 일 학년. 꽃피는 계절에 새내기가 되었지만 내 대학생활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꽃샘추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학교를 가기 위해 처음으로 부모 곁을 떠난 독립은 자유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다행히 졸업반인 언니가 있어 부모님은 두 딸이 안전히 학교를 다닐 수 있는 곳에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그때 부모님이 언니에게 맡긴 역할은 ‘ 철저한 보호자’였다.
처음에 언니는 그 역할을 잘 수행해 줬다. 전날 저녁이면 다음 날 입을 옷까지 완벽하게 코디를 해줬고 난 언니가 정해준 옷을 그대로 입기만 하면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언니가 매번 옷 골라주는 것을 번거로워하자 난 똑같은 옷을 다섯 벌 사서 교복처럼 입고 다니겠다고 말했다. 그때 나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언니의 눈빛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처럼 나는 아무것도 혼자 할 줄 모르는 반쪽이였다.
언니는 서양화를 전공하는 미술학도여서 졸업작품 준비로 점점 밤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아졌다. 그 바쁜 와중에 연애사업에도 열중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다. 난 점점 우두커니 언니를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나는 애꿎은 언니의 남자친구를 향한 원망의 마음이 커졌다.
언니의 관심 밖으로 밀려난 나는 원하지 않던 ‘ 홀로서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혼자 고민하고 혼자 결정 내려야 하는 시간들은 나에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도 했고 매사에 자신이 없어 늘 초조했다.
한편, 대학생활도 그다지 매끄럽지 못했다. 내가 원하던 대학이 아니라 대충 점수 맞추어 온 학과이다 보니 열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캠퍼스의 낭만이란 단어도 몰라 아무것도 재미를 붙일만한 게 없었다. 그저 나는 언니를 대신해 줄 누군가를 찾아 떠돌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언니처럼 보호와 통제를 완벽하게 해 주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나의 빈 시간을 채워줄 몇몇 친구들과의 시간을 영혼 없이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럴수록 학교 생활에 대한 기대는 점점 사라져 갔다.
그때 제법 도전적인 돌파구를 생각해 냈다. 이 재미없는 생활을 끝낼 방법, 휴학이었다. 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내 뜻대로 하겠다는 거부의 몸짓을 했던 것이다.
“ 아버지 저 휴학할게요. 학교가 진짜 재미가 없어요.”
“학교를 재미로 다녀?”
이 한마디로 내 첫 반항의 싹은 단칼에 베어졌다.
그때부터 내 학교생활은 무기력 그 자체였다.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내 의지라곤 없는 움직임뿐이었다.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구나. 이게 맞나?’
이런 생각과 고민의 끝에 ‘자아’라는 단어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난 혼자 먹고, 혼자 걷고, 혼자 학교를 배회하고, 혼자 생각하는 일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조금씩 혼자인 것이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또 고독한 분위기를 즐기는 내가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완벽히 혼자가 될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홀로 떠나는 여행이었다.
첫 홀로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연히 여행 관련 기사에서 발견한 밀양이란 도시, 그 도시가 비밀스럽게 품고 있는 얼음골이란 계곡. 난 그곳에 무조건 가야 하는 이유가 생긴 것처럼 홀로 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당찬 계획은 눈치 빠른 언니에게 금방 발각이 되었다.
“ 뭐? 혼자서 어딜 가겠다고? 너 혼자 여행 간 거 아버지가 알면 어쩌려고. 안돼! 절대 보내줄 수 없어.”
"언니가 뭐라 하든 난 갈 거야.”
언니는 처음 보는 나의 단호함에 놀라는 듯했다.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여자 혼자 여행을 가? 네가 진짜 갈 수 있을 것 같아?”
언니는 내 밑바닥에 깔려 있는 ‘혼자’라는 공포심을 자극했다. 하지만 어떤 협박에도 난 묵언수행 하듯 무반응으로 내 결의를 보여줬다.
드디어 떠나는 날, 역까지 따라 나온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 너 제발 무사히 갔다 와야 해. 너한테 무슨 일 생기면 나 아버지한테 죽어”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보호막을 벗어나 떠나는 동생의 어설픈 첫 발걸음을 언니는 그렇게 지켜봐 주었다.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기세 좋게 떠나기는 했지만 내 눈앞에 닥칠 일들을 혼자 감당할 수 있을지, 이 여행을 통해 내가 어떤 변화를 겪을지 등등 여러 가지 생각들이 실타래 엉킨 듯 제멋대로 얽히고설켰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난 더 이상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가 아니다.
이렇게 혼자서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난 당당히 기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