냥이가 음란한가 봐

by 어슴푸레

"엄마, 냥이가 음란한가 봐. 임신을 벌써 여덟 번이나 했데."

아이의 말이 너무 재밌어서 질문을 한다.


"음란한 게 뭔데?"

"음. 음란한 건 뭐랄까 성적으로 좀 자극되는 거?"

"자극되는 건?"

"기분이 좀 이상하고 뚜루뚜루한 생각이 드는 거?"

"하하하하. 우리 딸 다 컸네. 어린앤 줄 알았는데."

"아냐, 아냐~ 나 아직 아기야. 엄마 배 속으로 다시 들어갈 거야."


딸애가 고양이에게 음란하다고 한 내막은 사실 이렇다. 딸애에게는 두 살 때부터 절친인 지연이란 친구가 있다. 지연이네는 1년 전 강화도에 '세컨드 하우스'를 마련했다. 우리 애도 몇 번 그 집에 놀러가 먹이를 얻으러 출몰하는 길고양이들과 논 적이 있다. '음란 운운'은 그중 한 마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애티가 확연한 아이의 입에서 '음란하다'는 말이 '냥이'와 함께 나올 때, 어울릴 듯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재밌었다. '음란하면 여러 번 임신한다'라는 딸애의 좀 과한 결론을 심각하게 바로잡아 줄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어떻게 '음란하다'는 말을 아는지 신기했고, '고양이'보다 귀여운 '냥이'와 어른들의 세계에서나 쓰는 '음란하다'를 오묘하게 선택한 것이 신선했다. 멀쩡한 고양이가 음란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건 애석한 일이지만.


그 순간 불현듯 든 생각! '임신'의 주어로 동물이 오나? '고양이가 {임신하다}', '개가 {임신하다}', '소가 {임신하다}'... 이렇게 모든 동물에 두루 쓰나? 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동물이 임신하면 대개 '새끼를 배다'라고 하지 않나?


다음 날 출근해서 1938년 문세영 <조선어사전>부터 찾았다. '임신'을 '아이를 배는 것. 잉태하는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었다. 국내의 첫 국어사전은 '임신'의 주체를 '사람'으로만 한정한 것이다. 이때에는 동물한테 '임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언제쯤 '임신'을 동물에도 같이 쓰게 된 걸까. 2022년 현재 <표준국어대사전>은 '임신'을 '아이나 새끼를 뱀.'으로 풀이하고 있으면서도 동물에 대한 용례는 싣고 있지 않다. 흐음... 이쯤에서 직업병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동물에 대한 용례를 실어야 하는가, 뜻풀이를 사람으로 한정해야 하는가. 다른 국어사전들은 어떻게 풀이하고 있지? 웹스터나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pregnant'를 '(of a woman or female animal) having a child or young developing in the uterus.'로 풀이하면서 용례는 모두 'she, women, woman' 등 여성 대명사나 명사가 주어인 것만 제시하고 있다. 국내의 국어사전들도 대동소이했다.


이제는 말뭉치를 찾을 차례. <이문열, 변경>에 '개가 임신 중'이 발견된다. 1986년에 제1권이 나왔으니 최소한 1980년대에는 쓰이는 말이었겠구나. 그보다 오래된 신문 기사 같은 건 없나... 문득, 여덟 번 임신했다는 냥이의 나른하고도 무관심한 표정이 보이는 것만 같다.


워워. 여기서 그만.

아무도 민원을 제기하지 않았다.

뼛속까지 사전쟁이.


이게 이럴 일이야?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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