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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Dec 05. 2020

오늘부터 1일

저 좋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다

어쩌면 저는 전생에 노비였을지도 몰라요. 이름은 ‘팔월이’거나 ‘끝순이’였겠지요. 어려운 집에서 계획에 없이 생겨난 눈치 없는 아이는 뱃속에서부터 어미의 깊은 한숨과 눈물 젖은 목소리를 들으며 자랐을 거예요. 추석 이틀 뒤에 태어났으니 아이가 먹을 복은 있구나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그 어미는 변변한 몸조리도 못 한 채 가을걷이를 위해 들녘으로 나가야 했을 테니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요. 어느 시대 어느 고을의 뉘인지는 알 수 없으나 천출인 것은 분명해 보여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의 이 잡초 같은 강인한 생명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어요. 주말 이틀 내내 끙끙 앓다가도 월요일 새벽이면 일하러 갈 수 있을 만큼 컨디션을 회복하는 저를 보며 피식 웃음이 터진 적이 몇 번 있거든요. 이건 뭐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지나치게 책임감 있는 몸뚱이잖아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돈 벌러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주말 이틀

격정을 인내한

나의 병마는 지고 있다.      


분분한 피로...

월급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알량한 몇 푼과 그리고

더럽게도 더디 오는

월급날을 향하여

나의 병마는 꽃답게 죽는다.      


일어나자

무심한 손길로 눈곱을 떼며

해롱해롱 알람을 끄던 어느 날     


나의 노동, 나의 월급.

통장에 무언가 스칠 때 흔들리는

일개 노동자의 슬픈 눈.

  

현생에서는 흙수저(저는 농부의 자식입니다. 흙이 저를 키웠죠.) 출신의 노동자 역을 맡고 있어요. 피로가 목과 어깨에 더께더께 쌓여 있고, 종종 힘들어 죽겠다는 소리가 터져 나오긴 하지만 노비 팔월이가 아니라 선생 지르셔로 살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물론 아주 가끔은 제가 공노비구나 싶을 때가 있기도 하지만 그건 분명히 기분 탓일 거예요.



     

그런데 저란 사람은 참 배은망덕한 인물이에요. 저는 대의보다 일신의 안위에 전전긍긍하는 소시민으로서 그동안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종종 가슴을 쓸어내리곤 했거든요. 제가 조선 시대의 노비가 아니라서, 식민지 시대의 조선인이 아니라서, 독재 정권을 살아가는 대학생이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죠. 짓밟히지 않아도 되고, 목숨 걸고 투쟁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앞서 싸워준 이의 피, 땀, 눈물 덕분에 제가 이렇게 인간답게 살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느꼈어요. 분명히 그래 놓고는, 분명히 그랬으면서!      


‘모든 사람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말을 머리로만 알고 가슴으로는 모르는 제 자신을 종종 발견하고는 해요. 암요 암요, 모든 인간은 다 소중하지요. 그런데 저는 그 중에서도 특히 ‘얼굴 반반하고, 다소 유약하며, 심성이 곱고, 말과 행동이 부드러운 지적인 남자’를 특별히 소중하게 대하고 말아요. 저도 모르게 그래요. 철없고 솔직한 제 마음이 막 그렇게 나대요. 헌법 10조가 모든 국민을 존중해 주고 있으니,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저 정도는 마음 가는 대로 이렇게 좀 차별을 해도 괜찮겠지요. 조용히 마음속으로만 아끼는 건 문제 없잖아요. 정우성이랑 살림을 차리든, 동생 같은 박보검이랑 밀애를 하든, 조카 같은 유승호를 데리고 놀다가 뻥 차버리든 말든 상상에서는 뭘 못 해요? 아니 아니 지금 다른 남자를 만나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고요.      


혹시 제 남자 취향을 눈치 채셨나요? 네 제 이상형은 ‘구한말 지식인’이에요. 근육질의 상남자나 푸근한 아재는 쿨하게 양보할게요. 저는 다소 병약한 느낌을 주는, 제 두 팔로 안았을 때 폭 안겨 오는 그런 남자가 좋아요. 무거운 택배 상자를 척척 옮겨주는 남자보다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실 때 제 눈과 귀를 흐뭇하게 해주는 예쁜 남자가 더 좋아요. 그의 우수에 찬 고뇌하는 슬픈 눈망울을 보면, ‘아, 이 남자는 반드시 내가 지켜주겠어.’ 하는 다짐이 들 거예요. 그는 책상에 앉아서 펜대를 굴리며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거나, 괴로운 듯이 책을 탁 덮기도 하고, 진한 커피를 마시며 한없이 창밖을 응시하고 있으면 돼요.


아름다운 내 사랑!  좌동주 우백석


제가 식민지 지식인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은 어쩌면 최소한의 양심 때문일까요? 불의를 보면 눈을 꾹 감고 마는 소시민의 전형이지만, 일말의 양심은 있어서 죄책감을 덜고자 저와 다른 존재를 흠모하게 된 거죠. 아, 죄송해요. 이건 제가 말해 놓고도 민망한, 정성스러운 헛소리네요. 아닌 건 아닌 거죠. 다시 한번 사죄드립니다. 네네 인정합니다. 그냥 개취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 몹쓸 취향 때문에 저는 나날이 좀 곤란해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랑 같이 살고 있는 남자가 식민지 지식인은커녕 점점 앞잡이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거든요. 이건 심각한 문제예요. 마른 남자를 좋아하는 제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꽤 확고한 편인데, 이 남자는 예부터 지금까지 꽤 확대되고 있는 중이라서요. 그래서 제 마음이 점점 식어가고 있어요. 예전엔 남사친, 남친, 남편이었으나, 이제는 성별 구분조차 의미 없는 육아 동지, 동거인, 가까운 지인으로 지내고 있죠.

이런 사이도 개인적으로는 나쁘지 않거든요. 고백하자면 솔직히 조금 편한 면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면데면한 부부 사이가 자녀 교육에 도움이 안 된다는 거예요. 최선의 부부가 최고의 부모라면서요? 그럼 저는 이렇게 살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남편은 자신의 외모에 전혀 불만이 없고, 고기는 입에 좋아서 끊을 생각이 없고, 숨쉬기 운동 말고 다른 운동엔 흥미가 없대요. 이 말인즉슨, 그는 앞잡이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예의 식민지 지식인 언저리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 정확히 말하자면 생각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의지는 전혀 없어 보여요.  

사람들의 표정을 보세요, 앞잡이는 저만 싫어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다면 이제 공은 제 손으로 넘어 왔네요. 앞잡이와 한 집에 사는 지인으로 지내며 아이들에게 애매모호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부부로 지내며 인간 관계의 바람직한 롤모델이 되어 줄 것인가. 내 부모가 정말 사랑하는 사이였을까, 사랑이 떠난 자리엔 생활만 남는구나 하고 회의를 품게 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의 결실로 내가 태어나 이렇게 단란한 가족이 만들어졌구나 하는 믿음을 줄 것인가. 에이, 더 말해 뭐해요. 너무 빤한 결말이잖아요. 저는 낳아 놓은 사람으로서의 책임감과 모성애를 발휘하여 이제 그만 앞잡이를 받아들여야 하는 거잖아요. 마땅히 그래야 하잖아요. 껍데기가 뭐라고 그런 허물 따위에 집착하며 인생의 과업인 자녀교육을 망치겠어요. 그깟 취향이 뭐라고.     


안 그래도 저희 아들을 보면 불안불안 하거든요. 열 살이나 먹었으면서, 아니 십 년이나 살았으면 눈치를 좀 챙길 만도 한데 글쎄 자기밖에 몰라요. 마음에 안 들면 금세 울고요, 지기 싫어하고요, 양보나 배려는 머리로만 알고요, 맛있는 것은 자기가 먹어야 하고요. 친구랑 놀 때도 친구의 마음을 살펴서 함께 행복해야 하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놀이, 관심 있는 것만 하려고 해요. 아들의 이런 모습이 무척 걱정스러운데, 이게 왠지 남편을 대하는 제 모습을 보고 배운 게 아닐까 겁이 나는 거예요.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저한테 배운 게 맞겠지요. 그래요, 제가 문제요.      


네, 정신 차릴게요. 이제부터 앞잡이랑 잘 지내볼게요. 정말이에요. 노력할 거예요. 저는 부모니까요. 부모는 원래 자식한테 져주고 양보하는 사람이잖아요. 아이고, 취향 따위 그게 뭐라고 자식 교육을 그르쳐요. 마음을 바꾸는 건 쉽지 않으니, 우선 행동부터 바꿔볼게요.      



오늘부터 1일입니다.
쇼윈도 부부 +1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한 부모의 교육 철학과 태도

(최성애 HD행복연구소 소장, 세바시 1281회, https://www.youtube.com/watch?v=7QB48N5YnJM)







우리집 앞잡이의 자세한 모습은 아래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524604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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