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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Mar 14. 2021

오늘도 약 팔러 갑니다

너의 마음을 훔치고 싶다 진짜

교정에 ‘얼씨구야’가 울려 퍼지면 조용하던 교무실이 분주해져요.

“4교시 열차 출발합니다.”

“어머, 쌤 같이 가요!”

“완판하고 오세요. 화이팅”

작은 소란은 ‘돌돌돌돌 돌돌돌’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3단 트롤리가 교무실 문지방을 넘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트롤리 바퀴 소리가 희미하게 멀어져 가고 얼씨구야도 끝이 나면, 잠시 후 수업 시작을 알리는 본종이 칩니다. 곧이어 교무실에는 45분간의 짧은 평화가 찾아오죠.


반면 교무실 밖에는 옅은 긴장감이 깔립니다. 지하철 안에 울려퍼지는 ‘얼씨구야’ 가락이 환승객들을 출입구 앞으로 데려다 놓는 것처럼, 교정의 ‘얼씨구야’는 교사와 학생들을 교실로 몰아갑니다. 박 선생도 트롤리를 미는 두 손에 힘을 주고, 숨을 고르며 적진으로 나아갑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갑니다. 트롤리를 싣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두근대는 심장 박동이 느껴집니다. 속으로 조용히 읊조립니다. ‘나대지 마 심장아. 별거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나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언제나 참 어렵습니다. 나를 마뜩잖아 하는 시어른들을 마주해야 하는 상견례 자리에 들어서는 기분이랄까요. 그 상견례를 일주일에 스무 번쯤 하는 게 바로 중등 교사의 삶이에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한 번, 교실에 들어서며 한 번, 교탁 앞에 서며 한 번. 가만가만 작은 심호흡을 합니다. 두려움을 달래며 각오를 다집니다. “다 팔아 버릴 거야. 약도 팔고 나도 팔고.”



교탁 앞에 서서 교실을 둘러봅니다. ‘얼씨구야’ 덕분에 대부분의 고객님들이 착석해 계시는군요. 본종 끄트머리에 몇몇이 급히 뛰어 들어옵니다. 여전히 친구와 수다를 떠는 학생도 있네요. “땡~ 땡~” 보드게임용 종을 치며 “여러분, 저 왔어요. 제가 오면 어서 수업 준비를 하는 거예요. 쌤 오늘도 겁나 열심히 가르칠 거야, 최선을 다할 거야. 다 알려줄 거야. 불태울 거야. 난 준비 됐어. 그러니 여러분도 어서 준비해요. 바르게 앉고, 교과서랑 필기구 준비.” 호들갑을 떨며 인사를 합니다.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고객님들의 표정이 밝지 않습니다. 뭐, 늘 그렇기는 하지만요.

“어머 고객님, 표정이 왜 그리 어두워요? 아, 공복이라 많이 언짢으신가 보다. 에이, 힘내자. 한 시간만 참으면 점심시간이야. 뭐 우리가 4교시만 힘들어? 1교시는 잠이 덜 깨서, 2교시는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3교시는 지루해서, 4교시는 배고파서, 5교시는 졸려서, 6교시는 지쳐서, 7교시는 죽겠어서. 맨날 힘들잖아. 됐어 됐어. 이유를 찾자면 끝이 없어. 좋은 생각만 하자. 이 시간 즐겁게 공부하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똬악! 그러니 즐겁게 공부하자. 자 시작한다!” 그러나 제 말끝에 슬며시 따라붙는 한 마디!

“하필 국어 시간이잖아요.”

‘웁스! 뭐라고? 안 되겠군. 약부터 팔아야겠군!’



“어머, 우리 ㅇㅈ는 국어를 싫어하는구나. 그런데 국어가 왜 싫어? 수학은 미치겠고 영어는 모를 텐데. 과학은 어렵고, 사회는 안 외워지고. 따지고 보면 국어가 제일 쉽지 않아? 수학은 고작 0.0000001만 틀려도 오답이라고 하는데 국어는 아니잖아. 네 느낌이 맞다. 네 생각이 맞다. 오냐오냐,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하면서 다 맞다고 해주잖아. 국어만큼 너그러운 과목이 어디 있어? 내용은 또 얼마나 공감이 가니? 화자가 하는 이야기마다 맞아 맞아, 나도 그랬어, 네 마음 이해 돼 하면서 읽잖아. 소설은 또 어떻고? 한장 한장 넘기며 인물들이 갈등하는 거 흥미진진하게 지켜보기만 하면 되잖아.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이라는데 그 재미있는 거 마음껏 할 수 있잖아.”


“아니에요. 국어는 답이 없어서 어려워요.”


“어머, ㅇㅌ아, 그 말 진심이니? 해마다 수십만 수험생이 수능을 보는데 그 많은 사람이 답도 없는 문제를 푼다고 생각해? 우리 ㅇㅌ이는 수학이나 과학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그럴 수밖에 없는 답을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가장 적절한 것을 찾으라고 말하는 국어 문제는 왠지 불편한 거지? 그런데 말이야. 국어도 똑같아. 정답이 되고, 오답이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 ‘지문-발문-선택지’의 내용이 일치하면 정답이고, 일치하지 않으면 오답이야. 말하자면 다른 그림 찾기숨은 그림 찾기게임이라고 할 수 있지. 와, 이런 과목이 어딨어. 진짜 사랑스러운 과목 아니니?”


“생각해 봐, 수학이나 영어에 비하면 여러분이 국어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은 비교도 안 되게 적거든. 그런데 수능 점수는 100점으로 비율이 동일해. 가성비 최고지. 게다가 알고 보면 국어가 변별력이 높은 과목이거든. 조금만 더 열심히 해서 조금만 더 성적이 오르면, 국어가 너한테 날개를 달아준다는 뜻이야. 완전 효자 종목 아니니? 이렇게 기특한 과목이 어딨어. 그러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공부하고, 아껴주자.”


“맞아요, 저는 국어가 제일 좋아요.”

“어머, ㅇㅇ야. 넌 1학년 때도 그리 훌륭하더니 여전하구나. 잘 컸다 잘 컸어. 진짜 감동적이다. 이렇게 예쁜 아이를 다시 가르치게 되다니 나는 진짜 행복한 사람이야. 운도 좋지,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가르쳐야겠어.”



“애들아. 쌤이 첫 시간에 했던 말 기억나니? 국어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말이야. 진학이나 진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진짜 이유가 있었잖아.”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데 필요해요.”

“그렇지 그렇지. 기억하는구나. 우리의 삶은 말하고 듣고 읽고 쓰는 것의 연속이잖아. 그걸 국어 시간에 배우는 거야. 아니 이렇게 생활밀착형인 과목이 어디 있어? 배우면 바로 써먹을 수 있다고! 명심해, 연애하려면 맞춤법을 알아야 해! 70%의 사람들은 맞춤법을 틀리는 이성을 보면 호감도가 떨어진대. 특히 여자들은 맞춤법에 민감해서 맞춤법 틀리는 남자들을 보면 90% 이상의 여자들이 마음이 식는대. 아파서 어떻해, 감기 어서 낳아'라고 하는 순간 아웃이야. 기억해라, 연애는 인생의 꽃이다. 기대해, 으른의 연애는 진짜 진짜 진짜 진짜 재밌어. 그걸 누리려면 지금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해. 맞춤법은 기본이고 화자의 말에 귀 기울이며 공감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여자 친구가 전화해서 ‘지금 뭐해?’라고 물으면 눈치없이 ‘전화받고 있잖아.’라고 해야겠어? 달달하게 ‘네 생각하고 있지’라고 해야겠어? 정신 똑바로 차려, 말 한마디가 연애의 성패를 가르는 거야. 쌤은 너희의 찬란한 연애를 위해 수업하는 거다! 너 좋으라고 이렇게 애쓰는 거야. 난 틀렸거든. 너라도 즐겨. 너라도 행복하면 됐어. 난 이제 남친 생기면 곤란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국어 공부 잘해도 연애를 못 하면요?”

“이쁜아, 그럴 리 없지. 너라면 3개월에 한 번씩 새 여자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말이야 연애가 인생의 과업이긴 하지만 연애만큼 중요한 게 일이잖니? 어느 통계를 보니 직장인들의 88% 정도가 문서 작성에 어려움을 느낀대. 자신의 글쓰기 실력이 업무 효율이나 직장 내에서의 성공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서 안타까움을 느낀대. 그럴 수밖에 없지, 우리가 가진 능력은 결국 말과 글로 표현해서 보여줄 수밖에 없잖아. 능력은 출중한데 말하기가 안 돼서, 글쓰기가 안 돼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다면 너무 억울하잖아. 결국 국어 능력이 열쇠다. 그치?”



“이제 공부하고 싶어졌니? 이렇게 중요한 국어 공부를 하는데 자존심 상하게 고작 공복 따위에 지면 안 되지. 이제 시작한다!”

“마음은 준비가 됐는데, 배가 고파요.”

“인정! 쌤도 사실은 공복일 때 다소 사나워지는 편이거든. 아니 아니, 걱정 말아요, 해치지 않아요.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야. 다행히 아직 소량의 이성이 남아 있어요. 그리고 난 간식도 있지. 짠~ 먹으면서 공부하자.”

트롤리 맨 아래 칸에서 초코쿠키를 꺼내어 나누어 줍니다. 저는 준비된 교사니까요.


“애들아, 쌤 주말에 마트 갈 거야. 어떤 간식 사 올까? 너희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품목을 알려줘.”

“청포도 사탕이요.”

“어머, 예쁜아. 그건 안 돼. 청포도 사탕은 너무 위험해. 그거 먹다가 기도라도 막히면 쌤이 수업 하다말고 이렇게 이렇게 하임리히법 해야 하잖아. 너희가 청포도 사탕을 사랑하는 건 알아, 집에선 먹지도 않는데 학교만 오면 그 촌스러운 사탕이 왜 그렇게 소중한지, 지루한 수업 시간을 버티게 해주는 긴 마법이란 건 알지만 미안. 청포도사탕만은 안 돼. 나 너무 무서워.”

“몰티저스요.”

“아, 몰티저스. 그래 쌤도 몰티저스 먹어보고 맛있어서 간식 바구니에 담을까 하고 검색해 본 적 있어. 그런데 비싸더라고. 내 월급은 작고 귀엽지만, 두 아이 키우며 아등바등 살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ㅈㅎ이가 몰티저스를 사달라고 하면 쌤이 또 긍정적으로 검토를 해봐야지. 다행히 수제 마카롱 아닌 게 어디야. 괜찮아, 이번 달에도 가난하면 돼. 난 진짜 괜찮아.”



“애들아, 쿠키 먹는 동안 들어봐. 예전에 책을 읽다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뭔지 묻는 설문조사 결과를 봤거든. 결과가 정말 놀라웠어. 나이 불문, 남녀 불문 가장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게 바로 ‘공부 좀 할걸’이었어. 10대, 20대, 30대, 40대까지는 남녀공통 가장 후회스러운 항목이었고, 50대, 60대, 70대에도 여전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걸 후회하더라고. 지금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게 된다는 뜻이지. 그런 점에서 너흰 얼마나 다행이니?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남은 인생은 후회 없이 살 수 있잖아. 좋겠다 너흰. 부럽다 진짜. 난 이미 글렀어.”

남자들의 후회 '아내한테 잘할걸'. 여자들의 후회 '이 남자랑 결혼한 것'. 온도 차 무엇ㅋㅋㅋㅋㅋ


“아, 이제 진짜 미친 듯이 공부하고 싶다. 의욕이 불끈불끈하지? 자 그럼 지난 시간에 배운 것 복습할게. 숟가락 돌린다. 찰랑찰랑 찰랑. 내가 뽑혀라 내가 뽑혀라 하고 주문을 외워. 이 숟가락 돌아가는 소리가 신의 은총처럼 느껴질 때 비로소 실력 완성! 됐어 그땐 하산해도 돼. 찰랑찰랑 찰랑 찰랑찰랑 찰랑. 나만 믿어, 쌤이 서울대 보내줄게. 다른 뜻은 없어. 서울대가 우리 학교에서 제일 가깝고, 학비도 저렴하니까 가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다고. 멀리 다니려면 힘들어. 편히 서울대 다녀.”



찰랑찰랑 찰랑 찰랑찰랑 찰랑~ 오늘도 박선생은 열심히 약을 팝니다. 한껏 익살스러운 말투로 호들갑을 떨다가 아주 잠깐, 먹고 살기 참 힘들다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지만 이내 머리를 젓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이토록 순수한 직장동료를 만나겠어요. 16살, 나의 귀여운 동료들은 오늘도 솔직하고, 오늘도 말랑하고, 오늘도 사랑스럽습니다. 아주 초큼 무섭기도 하지만요.

괜찮아요, 저는. 오늘도 행복하다고 믿을래요.


공정하게 하나씩 넣었어. 네 번호만 세 개 넣은 거 아니냐고 묻지마욧.



 '얼씨구야'가 뭐냐 하면 말이지요.


https://youtu.be/esDCB-SqZ0I


저희 학교 예비종은 얼씨구야 가락과 함께 "학생 여러분, 잠시 후 열차가 출발합니다. 교과서와 필기구를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안내 방송이 흘러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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