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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르셔 꽤 Sep 14. 2020

3년째 인내 중인 박선생

                                  

몇 년 전의 일이에요. 서로 쿵짝이 잘 맞는 젊은 미혼 여선생님 두 분은 조용조용 수다를 떨고 있었고, 아줌마인 저는 그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호기심, 부러움, 귀찮음, 바쁨 등의 감정을 느끼며 늘 그렇듯 밀린 일을 하고 있었어요.(원래 일은 늘 밀리기 마련이죠. 밀리지 않는 것은 꼬박꼬박 돌아오는 명절과 카드결제일뿐이잖아요.) 둘은 사이좋게 맞장구를 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작아서 내용이 잘 들리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때 놀라울 만큼 선명하게 들리는 말이 있었어요. 그건 청각이 한 일이라기보다, 깜짝 놀란 제 마음이 식스센스를 발동해서 공중에 흩어지는 소리들을 영혼을 끌어 모으듯 그러쥔 덕분이 아닐까 싶어요. 뭐랄까 일종의 방어본능 같은 것!

“나는 진짜 이해 안 되는 게 문자나 카톡에 그 주황색 숫자가 막 50, 100 이렇게 있는 거요. 그거 너무 신경 쓰여요. 어떻게 그러지?”


‘뜨끔! 어머, 저 부르셨어요? 흠... 그게 그렇게 이상해요? 어차피 문자나 메일은 광고 아니면 알림문자나 명세서이니 굳이 확인할 필요를 모르겠고, 카톡도 이것저것 쓸데없는 게 많이 오니까 안 봐도 아쉬울 게 없고, 공람이야 뭐 말할 것도 없죠.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 아니에요? 흐음 내가 어수선하고 허술한 거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해야겠어. 무질서한 핸드폰 바탕화면부터 어서 숨겨. 뜨아, 문자 옆 동그라미에 215라고 적혀있잖아. 이거 들키는 순간 그녀들이 말한 진짜 이해 안 되는 이상한 사람 되는 거라고!’


완전 범죄를 노린 것은 결코 아닌데 한 번은 핸드폰을 잃어버렸어요. 어머, 의심하지 마세요, 저는 게으르고 정리를 못하는 거지 멍청한 건 아니에요. 설마 고작 215를 숨기려고 핸드폰을 유기하겠어요? 단호하게 그건 아닙니다. 그냥 잃어버린 거예요! 동선을 더듬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니 아무래도 키즈카페에 두고 온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매장에 전화를 걸었어요. 핸드폰을 두고 온 것 같은데 확인 좀 부탁한다, 기종은 뭐고, 케이스에는 나무와 꽃이 그려져 있고, 색상은 검정이다라고 핸드폰의 신상을 낱낱이 털어보였죠. 그러자 친절한 알바 동생이 말했어요. “네 확인해 보니 유실물이 있기는 한데요, 말씀하신 검정 색상이 아니에요.”라고. “아 네, 다른 곳에 흘렸나 보네요.”라고 답하고 끊었죠.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그 키즈카페에 가게 되었는데 혹시나 해서 카운터에 또 문의를 해봤어요. 그러자 알바생이 유실물이 든 서랍을 꺼내서 보여주더군요. 그런데 거기에 제 핸드폰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어머, 이거 제 거예요. 제가 전화드렸을 땐 없다고 하셨는데요.”하자, “그때 고객님은 검정이라고 하셨잖아요. 이건 흰색인데요?” 뜨아, “네? 뭐라구요? 제 핸드폰이 흰색이었어요? 제가 2년 동안 쓰면서 흰색으로 변한 건가요? 얘가 도대체 왜 흰색이죠? 아, 아니에요. 부탁인데 이 일은 제발 잊어주세요.”


이쯤되면 멍청한 게 맞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며칠 전에 교무실 선생님들께서 모두 입을 모아 제가 현명하다고 말씀하셨는걸요? 그날따라 유난히 업무 메세지가 쏟아져서 모두들 정신이 없으셨나 보더라구요. “아, 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네. 무슨 메세지가 이렇게 많이 와.”라고들 하시기에 제가 얘기했죠. “메신저를 왜 보죠? 메세지는 보는 게 아니라 보내는 겁니다. 메신저는 제가 필요할 때만 쓰는 겁니다.” 그랬더니 다들 빵터지시며, “아, 자기 진짜 웃긴다. 그런 건 생각도 못해 봤어. 자기 진짜 똑똑하다. 오늘의 명언이야.”라고 폭풍 칭찬을 하시더군요. 역시 직장이 좋긴 좋네요. 일로 만난 사이는 언제나 이렇게 참 친절하죠. 저희 이모는 제가 전화를 받고 싶을 때만 받는다고 혼내셨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보기엔 전 정리를 못하는 것도, 멍청한 것도, 웃긴 것도 아니고, 단지 참을성이 좀 있는 것 같아요. 이건 제 지인 몇 명만 알고 있는 이야기인데요. 다른 사람한테 말해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 나름 비밀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게 뭐냐면요. 우선 아래 사진을 좀 보세요.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 NEIS) 결재 페이지인데요.

결재자를 지정할 때 자주 쓰는 결재라인을 ‘나의 결재선’으로 지정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결재선이 뭔가 이상하지 않으세요? 네, 기안자, 협조자, 결재자의 근무 학교가 다 다르네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일까요? 무슨 일은 무슨 일이에요. 별일 아니고요. 이 결재선은 제가 2016년도에 등록한 추억의 라인이에요. 17년도에는 임부장님이 휴직을 하셨고, 저는 18년도에 전출을 했어요. 전출과 동시에 1년 휴직을 했고 지난해와 올해는 근무 중입니다. 그러니까 저 결재선은 제가 16년도에 등록을 해서 몇 번 유용하게 쓰다가 17, (휴직) 19, 20, 이렇게 3년째 귀찮아 하는 중이에요. 세 명이 서로 다른 학교로 뿔뿔이 흩어졌으니 저 결재선을 다시 쓸 일이 없겠지만 저는 지우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지우는 방법을 찾는 건 귀찮고 특별하지만, 결재를 올릴 때 저 두 명을 선택해서 지우는 건 새로 배워야 할 것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거든요. 물론 두 명을 클릭하고 삭제 버튼을 누를 때마다, 이 과정을 매번 반복하는 제 자신이 좀 어이없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정도의 미련은 애교다 싶고 이렇게 서정적이고 유니크한 결재라인이 또 있을까 싶어서 굳이 일부러 지우지는 않고 있어요. 다들 효율성을 추구할 때, 저는 저만의 속도로 갬성을 추구하는 중이라고 할까요? 박부장님, 임부장님, 오겡끼데스까. 와따시와 와따시와 겡기데쓰.


보세요. 저는 이렇게나 참을성이 많아요. 가끔 카페에서 ‘누가누가 더 게으르나, 나는 이만큼 게을러봤어요’라며 베틀을 하실 때가 있더군요. 그 글을 무척 즐겁게 키득거리며 읽기는 했습니다만, 저는 그 중 딱 한 분만 인정해요. “물 뜨러 가기 귀찮아서 커피믹스 그냥 침으로 녹여먹였어요.”라고 하신 분이요. 아, 범접할 수 없는 경지로군요. 하지만 오래 참아봐야 10분이었겠지요. 3년째 참고 있는 제가 한 수 위군요. 어머, 게으름이라뇨? 호도하지 마십시오. 이건 틀림없는 인내심입니다.


#인내심좋아하네  #으이구화상아 #지금보니안읽은문자가364개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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